제주 ‘유소년 육성’ 캠프에서 기본기 가르쳐…이승엽 도우미로 나서 좌·우타자 홈런왕 조우도
KBO 넥스트 레벨(Next Level) 트레이닝 캠프는 이런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대책 중 하나다. 한국 야구의 미래가 될 유망주들을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게 목적이다. 유소년 야구 발전을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민체육진흥공단이 후원에 나섰다.
1월 10일 제주 서귀포시에서 시작한 1차 캠프에는 리틀야구 국가대표 상비군 선수 44명이 참가하고 있다. 이들은 24일까지 필드 훈련, 피지컬 트레이닝, 바이오 메커닉스 측정을 통해 기본기를 다지고 프로 출신 지도자들의 노하우를 전수받는다. 오는 2월 7~25일 고교 입학 예정인 중3 우수 선수 40명을 대상으로 2차 캠프를 진행한다. 2개월 동안 이 꿈나무들의 훈련을 살피고 지휘하는 사령탑 역할은 KBO리그 레전드 타자인 장종훈 감독(54)이 맡았다.
#한국 야구 미래 위해 의기투합한 장종훈-이승엽
장종훈 감독은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40홈런 타자다. 1991·1992년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고, 3년 연속(1990~1992년) 홈런·타점왕에 올랐다. 골든글러브도 세 포지션에 걸쳐 다섯 번(유격수·1루수 각 2회, 지명타자 1회) 받았다.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고 연습생으로 입단했다가 리그 최고 타자로 성장한 '육성선수 신화'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1차 캠프에 모인 초등학교 6학년 야구선수들에게는 그리 유명인이 아니다. 장 감독은 "이 친구들은 장종훈은커녕 선동열 선배도 잘 모른다. 요즘 선수들에게는 이정후(키움 히어로즈)와 강백호(KT 위즈)가 최고 스타"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장 감독 앞에서 호쾌한 스윙을 하던 강하경 군(진주시 리틀)에게 "그럼 '이종범'이 누군지는 아느냐"고 물었다. 강 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이정후 선수 아빠라서"다. 장 감독은 그래도 마냥 흐뭇해했다. "내가 누군지 모르면 어떤가. 어린 선수들의 야구 열정에 매일 감동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 야구 역대 최고 타자이자 KBO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승엽 SBS 해설위원(45)은 어깨가 무거운 장 감독을 돕기 위해 '일일 인스트럭터'로 제주에 왔다. 이 위원은 역대 한 시즌 최다 홈런(2003년 56개)과 통산 최다 홈런(467개·한일 합산 626개) 기록을 모두 보유한 '홈런의 대명사'다. 골든글러브를 역대 최다 수상(10회)했고, 정규시즌 MVP도 5차례(1997·1999·2001~2003년) 받았다. 8년간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었는데도 그렇다.
이 위원은 지난 18일 저녁 리틀야구 선수들에게 '야구선수의 꿈'을 주제로 강연했고, 19일엔 필드 훈련장을 찾아 선수별 맞춤 원포인트 레슨을 했다. 이 위원은 "내가 이 선수들 나이일 때, 삼성 라이온즈 코치님들과 이만수 선배님이 학교에 오셔서 같이 야구를 한 기억이 있다"며 "40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좋은 추억이다. 이 친구들에게도 그런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왔다"고 했다.
'40홈런 시대'를 연 우타 홈런왕 장종훈과 '50홈런 시대' 주역인 좌타 홈런왕 이승엽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이벤트다. 두 레전드가 현역 시절 친 홈런 수가 도합 996개. 장종훈의 등번호 35번과 이승엽의 등번호 36번은 각각 한화 이글스와 삼성 라이온즈에 영구 결번으로 남아 있다.
과거 인연이 없던 장 감독과 이 위원은 19일 야구장에서 만나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가워했다. 이 위원은 "어린 선수를 지도하러 왔지만, 사실 장종훈 선배님을 만난다는 생각에 더 설렜다. 어렸을 때 만화 캐릭터('홈런왕 왕종훈')로 나오셨던 분이고, 야구선수로서 늘 동경하던 분"이라며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뒤, 선배님의 홈런 기록을 목표로 바라보며 달렸다. 대선배님이 유망주 육성을 위해 고생하시는 데 대해 야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 인사를 드린다"라고 했다. 장 감독은 "이승엽 위원과 이렇게 경기장 밖에서 만난 건 처음인데, 나야말로 정말 영광이다. 내 기록이 갑자기 초라해질 정도"라며 "이 위원이 와준 덕에 어린 선수들에게 더 뜻깊은 시간이 될 것 같다"고 화답했다.
#장종훈 "유망주들 실력 기대 이상, 미래 밝다"
KBO 넥스트 레벨 트레이닝 캠프는 유소년 선수들에게도 바이오 메카닉스를 비롯한 첨단 과학 훈련 프로그램을 적용한다는 게 큰 특징이다. 랩소도, 트랙맨, 엣저트로닉, 블라스트 모션 등 첨단 트래킹 장비를 통해 선수들의 투구와 타구를 과학적으로 측정한다. 특히 여러 대의 캡처 카메라로 3D 동작을 분석하는 '테이아 마커리스'와 타자의 무게 이동 패턴, 지면 이용 능력, 스윙 스피드 등을 파악하는 '스윙 카탈리스트'는 야구 분야에서는 국내 최초로 도입된 장비다.
캠프에 참가한 유소년 선수들은 이 프로그램들을 통해 수집된 신체 데이터를 기반으로 피지컬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 KBO 관계자는 "운동 역학적으로 선수 개개인이 보완해야 할 부분을 찾아내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하려는 의도다. 선수들의 동작과 신체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분석해 올바른 야구 기본기를 정립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장종훈 감독은 과거엔 볼 수 없던 '과학적 시스템'에 감탄하고 있다. 장 감독은 "우리 세대는 접해본 적도 없는 최첨단 장비들이다. 이런 걸 아이들이 처음 써볼 기회를 얻게 돼 굉장히 신기해한다. 큰 반향을 일으킬 것 같다"며 "어린 선수들이 기운을 많이 얻고 있고, 실력이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물론 "좋은 기계를 이용한다고 야구 실력이 느는 건 아니다. 첨단 장비를 활용하되 일단 자기 기량 연마에 신경을 써야 한다"며 "하루에 30분도 좋고, 1시간도 좋으니 그날 그날 배운 걸 꼭 복습하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반복해서 연습해보면 더 빨리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조언했다.
첨단 장비보다 더 놀라운 건 리틀야구 선수들의 실력과 의지다. 장 감독은 "솔직히 실력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왔는데, 투수 중에 좋은 선수가 많이 보인다. 또 유격수를 맡는 친구들이 많은데, 기본기나 수비 동작이 기대 이상이다. 리틀야구 지도자들이 정말 잘 가르치셨는지 선수들의 야구 수준이 높더라"며 "한국 야구의 미래가 밝다고 느꼈다. 지금은 나와 코치들 모두 선수들에게 야구 기술을 가르치기보다 기본기를 확실히 다질 수 있도록 돕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장 감독은 또 "야구를 잘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좋은 인성을 갖고 올바르게 성장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 친구들이 잘 자라고 주변 감독님이나 코치님들도 잘 이끌어주셔서 한국 야구를 더 좋은 길로 이끌 대들보가 되길 바란다"며 "만날 승패에 연연해야 하는 프로에 있다가 여기서 어린 친구들을 보니 마음이 편하고 에너지도 얻는다. 이 캠프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참가 선수들에게는 평생 남을 추억이 될 거고, 앞으로 참가하고 싶은 선수들에게는 확실한 동기 부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승엽 "올바른 과정의 소중함 배워가길"
1박 2일간 '지원군'으로 찾아온 이승엽 위원은 장종훈 감독을 비롯해 캠프에 상주하며 선수들을 지도하는 선배 코치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아들 셋을 키우고 있지만, 그것보다 유망주 육성이 더 힘들 것 같다. 여기 있는 44명의 선수 중 몇 명이나 프로야구 선수가 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며 "참가 선수들에게는 정말 뜻깊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릴 때 이런 캠프가 있었다면, 예전에 했던 노력과 대선배님들의 조언, 첨단 시스템까지 합쳐져서 홈런을 더 많이 쳤을 것 같다. 야구 선배님들이 먼 곳까지 와서 고생해주시는 것에 대해 야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했다.
이 위원은 강연과 원포인트 레슨을 통해 '과정'이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 위원은 "프로야구 선수 이전에 '좋은 사람'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아직은 이 선수들은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한 나이다. 부상 없이, 친구들과 잘 지내면서 훈련을 충실히 소화하는 과정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다"며 "진정한 승부를 봐야 할 시기는 5년 뒤, 10년 뒤에 온다. 지금은 기본기와 자신의 인생을 중요하게 여기고, 학생다운 학생으로서 미래를 준비했으면 좋겠다. 학생 선수들과 그 선수들의 부모님들께 꼭 말씀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구체적인 꿈을 가져야 한다'는 주문도 했다. 이 위원은 "이렇게 어린 친구들은 확실한 꿈과 목표가 있어야 그 꿈,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할 수 있다. 맹목적으로 연습하고 경기하면서 하루하루를 그냥 보내는 건 사실 무의미하다"며 "어떤 꿈을 갖고 어디까지 갈 것인지 확실히 목표 설정을 하고 난 다음 운동을 한다면, 여기 있는 모든 선수가 스타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 과정을 충실히 밟으면서 학창시절을 보낸다면, 행여 '좋은 선수'가 되지 못하더라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실제로 투수 조현태(인천서구 리틀) 군은 이번 캠프에서 코치들에게 들은 여러 조언 중 "지금은 실패해도 된다"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우리 나이 떄는 안타나 홈런을 많이 맞아도 된다고, 그게 좋은 선수로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하셨다"는 거다. 이승엽 위원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KBO의 '넥스트 레벨'을 보여 줄 야구 꿈나무들은 그렇게 야구와 인생의 진리를 함께 배우고 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