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무죄 취지 바뀐 보고서인데도 내부 시스템 미등록 이례적…권순일 전 대법관 ‘재판 거래 의혹’ 다시 불거져
하지만 검찰 수사는 미진하다. 잇따라 영장을 청구했지만 기각되면서 관련 자료를 확보할 방법이 요원해졌다. 수사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재판 거래가 있었다’고 입증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검찰도 무리하게 수사를 진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법원 안팎에서 ‘의아함’ 표현
1월 19일 문화일보는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인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관련 검토보고서가 대법원의 내부 시스템에 올라와 있지 않다고 보도했다. 이재명 후보는 친형 강제입원 관련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로 2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해당 검토보고서 작성에 관여한 소수의 재판연구관들을 제외하면 열람을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법원 내에서는 비판이 제기된다. 통상적으로 전원합의체로 회부되는 사건의 경우, 공동 재판연구관 1~2명이 1심과 2심 판결문 및 관련 기록을 검토한 뒤 이를 보고서로 작성해 대법관들에게 보고한다. 대법관들이 사건 관련 판단을 할 수 있는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것인데, 보통 유죄에서 무죄, 무죄에서 유죄 취지로 원심 판단이 뒤집히는 경우에는 보고서를 내부 시스템에 등록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단으로 추후 다른 사건에 미칠 영향이 크기 때문에 재판연구관들의 기록을 남기는 목적이다. 때문에 판결 선고 전에는 다른 재판연구관들은 이 보고서를 볼 수 없도록 조치해놓지만, 선고 이후부터는 내부 열람이 가능하다.
2심에서 유죄였지만, 대법원에서는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을 받게 된 이재명 후보. 하지만 재판 보고서는 내부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법원 안팎에서는 ‘의아함’을 표현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재명 후보의 상고심 사건에 대해 대법원 재판연구관이 작성한 보고서가 등록된 것은 2건. 2019년 9월 대법원에 사건이 접수된 뒤 대법원 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에 작성된 심층 검토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1차 보고서와, 유죄 판결(원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작성된 2차 보고서가 있다. 하지만 다음 해 대법원 전원합의체로 사건이 회부됐고, 별도의 보고서가 등록되지 않은 채 사건은 무죄 취지로 바뀌어 결론이 나왔다.
재판연구관 근무 경험이 있는 한 판사는 “당시 무죄 취지 파기환송 결론을 놓고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해석했다’는 얘기가 나왔었다”며 “유·무죄 취지가 바뀌는 사건의 보고서가 등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판사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 “실제로 재판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조금 의아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입증하기는 어렵다’는 전망
의아한 지점들은 더 있다. 당시 이재명 지사의 유·무죄 판단을 놓고, 권순일 대법관을 제외한 10명의 대법관은 5 대 5로 의견이 나뉘었다. 이때 권 전 대법관이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했다는 후문이다. 권 전 대법관은 2020년 9월 퇴임한 뒤 화천대유 고문을 지내면서 월 1500만 원의 고문료를 받았다고 알려졌다. 권순일 대법관이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면서 재판 거래를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지점이기도 했다.
시민단체들은 권 전 대법관을 사후수뢰,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대법원의 이재명 지사 무죄취지 파기환송 선고를 앞두고 화천대유 대주주이자 경제매체에 근무 중이었던 김만배 씨가 8차례 권 전 대법관 사무실을 방문한 사실도 드러났다. 검찰은 법원행정처로부터 김 씨의 대법원 출입 기록을 임의제출 형식으로 제출받아 이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 이후, 검찰 수사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관련 자료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전담수사팀(팀장 김태훈 4차장검사)은 2021년 말 대법원 재판연구관 보고서를 확보하기 위해 법원에 압수수색 영장을 두 차례 청구했으나 모두 기각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에 재판연구관 보고서를 임의제출해달라는 협조 공문도 보냈지만 대법원이 응하지 않았고, 이에 정식 영장을 청구했지만 기각된 것이다.
의아한 지점은 많지만 실제로 검찰 수사로 ‘입증하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힘을 받는 대목이기도 하다. 검찰은 김만배 씨가 권순일 당시 대법관을 만나 사건 관련 청탁을 하고, 권 대법관이 이를 실제로 사건 판단에 반영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권 전 대법관과 김 씨 모두 의혹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둘의 대화가 오간 내용들을 모두 상황 증거로만 입증해야 하는데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수 수사 경험이 많은 한 검사는 “권 전 대법관과 김 씨가 만난 뒤, 김 씨가 제3자에게 ‘청탁을 했다’고 얘기를 해도 이는 핵심 증거가 아니라 전언에 불과해 증거로 쓸 수가 없다”며 “권순일 당시 대법관이 유죄로 사건을 생각하다가 청탁을 받고 무죄로 사건이 바뀌었다는 것도 입증을 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하겠나. 청탁이 있었다고 해도 실제로 재판 결과에 반영됐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누군가 ‘자백’을 하지 않는 한 확인하기 어려운 수사”라고 설명했다.
선거를 앞두고 검찰이 재판 거래를 적극적으로 수사하기는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차장검사 출신의 변호사는 “검찰 수뇌부는 여당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많고, 재판 거래 사건은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이재명 후보에게 불리한 사안”이라고 풀이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재판 거래 의혹 관련 ‘터질 게 많다’는 소문이 법조계를 떠돌고 있다. 익명의 대법원 관계자는 “권순일 당시 대법관을 도운, 조력자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도 나오는 등 여러 ‘설’이 난무하다”고 귀띔했다. 다만 아직 대법원 내에서는 재판 거래 의혹 관련 사실관계 확인 등은 공식적으로 진행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