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서 2억 5000만 원짜리 팔리고 ‘공병 재테크’도 인기…“샤테크·롤테크보다 중장기 투자가치 높아” 분석도
유통업계에 따르면 최근 2억 5000만 원짜리 싱글몰트 스카치위스키 ‘고든 앤 맥페일 글렌리벳 제너레이션스 80년’ 2병이 모두 판매됐다. 한 잔에 1087만 원 정도다. 이 위스키는 1940년 스코틀랜드 북부 외곽 글렌리벳 증류소에서 만들어졌으며 전 세계에 250병밖에 없다.
지난해에는 9100만 원짜리 프랑스산 와인 '로마네 꽁띠'도 팔렸다. 로마네 꽁띠는 프랑스 부르고뉴 마을단위 특등급 포도밭에서 피노 누아 품종으로 만들어졌으며,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평생 한 번이라도 맛보고 싶은 와인으로 꼽힌다. 1년에 6000병 한정 생산되며 매년 구매의향서를 받아 심사한 뒤 ‘자격을 갖춘 고객’에게만 판매한다. 빈티지에 따라 가격이 제각각이지만 희소성이 높아 세계 최고가를 자랑한다.
초고가 위스키·와인에 대한 인기는 백화점 주류 판매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9일 낮 12시 30분쯤 서울 강남구의 한 백화점에 초고가 주류를 모아둔 판매부스에는 할인제품 판매부스만큼 인파가 붐볐다.
흥미로운 점은 부스를 가득 메운 구매희망자들이 술을 마시거나 선물하기 위해 사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초고가 위스키·와인 등이 투자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싱글몰트 위스키 ‘글렌피딕 30년’을 보고 있던 전용권(29) 씨는 “최근 1200만 원짜리 글렌피딕 40년산을 봤는데 이미 예약 완료된 상황이었다”며 “(위스키는) 빈티지가 높아질수록 가격이 훌쩍 뛰기 때문에 안전하게 투자한다 생각하고 소장하기 좋다”고 말했다. 되팔기 위한 투자, '술테크'다.
그렇다고 해서 와인을 포함한 모든 초고가 주류가 술테크의 대상은 아니다. 주류 전문가들은 투자가치가 높은 술로 위스키를 꼽는다. 해마다 품질이 달라지고 오래 묵어야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는 와인과 달리 한정 생산되는 위스키의 경우 희소한 데다 오랜 기간 숙성된 상태로 나오기 때문에 판매되는 첫해부터 가치가 오르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일본 산토리는 지난해 1월 ‘야마자키 55년’ 100개를 한정 판매했다. 야마자키 55년은 1964년 이전에 증류해 55년간 숙성시킨 몰트를 사용했다. 가격은 2만 7500달러(한화 약 3160만 원). 이 위스키는 같은 해 8월 홍콩의 한 경매장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당시 79만 5000달러(한화 약 9억 원)에 낙찰됐다.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는 “다양한 술 중에서 숙성 기간에 따라 금액이 치솟는 건 위스키다. 즉, 희소성과 빈티지에서 투자가치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며 “위스키 가격은 한 번 올라가면 쉽게 내려가지도 않아 술테크로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 증류소에서 생산할 수 있는 위스키는 한정돼 있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증류소의 위스키를 구매하는 것도 술테크의 한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위스키가 재테크의 한 수단으로 떠오른 이유는 ‘세월이 빚은 술’이라는 특성에 기인한다. 특히 한 증류소에서 나온 싱글몰트 위스키는 그해 술을 넣고 길게는 64년까지 긴 시간 숙성시켜 만든 원액을 담아 만들기 때문에 막 찍어낼 수 없다. 그해 생산하지 않았을 경우 18년 후에는 18년산, 64년 후에는 64년산 싱글몰트 위스키를 생산할 수 없다. 로얄 살루트의 마스터 블렌더 콜린 스캇은 “위스키의 경우 원액을 오크통에 넣어두면 매년 2%씩 증발하기 때문에 숙성 기간이 길수록 남은 원액은 더욱 진귀해져 가치가 높아진다”고 설명한다.
이 같은 사례는 위스키 경매 현장에서 자주 볼 수 있다. 2019년 10월 영국 런던 소더비경매장에서 '1926 맥캘란 파인 앤 레어' 60년산이 190만 달러(한화 약 23억 원)에 낙찰됐다. 한 잔당 4만 2000달러(5100만 원)에 달한다. 이 위스키는 그보다 10년 전인 2009년 미국 뉴욕 크리스티경매장에서 5만 4000달러(약 6600만 원)에 팔렸다. 10년 만에 가치가 수십 배 뛴 것이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위스키 경매가 열렸던 2019년 4월, 싱글몰트 위스키 ‘맥캘란 72년 제네시스 디캔터’가 1억 5000만 원이 넘는 금액에 팔렸다. 이 위스키는 1940년대에 오크통에서 숙성하기 시작해 극도의 희소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맥캘란 브랜드에서 연산도 가장 높다. 당시 이 제품은 우리나라에 두 병 입고됐는데 7000만 원에서 시작한 가격이 1억 5000만 원까지 뛰어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위스키업계에 따르면 국내에 들어온 40년산 이상 위스키는 매년 평균 15∼20% 정도 가격이 오르고 있다. 위스키업계 관계자는 “위스키 마니아나 위스키 재테크를 하는 이들은 위스키의 콜렉팅을 위해 직접 해외 경매에 참여하거나 스코틀랜드 등지의 증류소를 방문해 직매하기도 한다”며 “시간이 갈수록 품질은 같지만 값어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중장기 투자가치품이나 상속 재산으로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중장기적 투자가치' 면에서 위스키는 샤테크, 롤테크와 차이를 보인다. 샤넬, 롤렉스 등도 국내 물량 확보는 일정하지 않지만 단종되지 않는 한 언젠가 재생산될 수 있다. 결국 샤테크, 롤테크 등은 단기간 투자로는 수익을 거둘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위스키 가치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주장도 있다. 백화점업계 한 관계자는 “샤넬, 롤렉스의 경우 언제 물량이 들어오는지 백화점 측도, 담당 매장 측도 모르지만 어쨌든 들어오긴 한다”며 “이런 점이 위스키와 차이가 있지 않나 싶다. 고가의 위스키의 경우 가격이 워낙 비싸 점포별로 한정 물량만 가져다 놓기도 한다”고 말했다.
다만 이러한 위스키는 엄청난 고가여서 진입장벽이 높다. 아주 비싼 위스키를 구매하지 못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대신 ‘위스키 공병 재테크’가 인기를 끌고 있다. 실제 중고거래 사이트, 중고 물품 애플리케이션 등에 ‘위스키 공병’이라고 검색하면 수십 개의 매물이 뜬다. 대체로 정품 케이스 여부, 현재 해당 위스키 브랜드의 가격 등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중고거래 사이트를 보면 레미마르탱 루이13세(코냑) 공병은 25만~30만 원에 거래되고 있다. 코로나19 시기 이전 공병 시세가 10만 원 정도였던 점을 감안하면 3년 새 배 이상 오른 것이다. 특히 2007년 출시한 ‘루이13세 블랙펄’(당시 판매가 1500만 원)의 공병 가격은 무려 190만 원이다. 해당 제품은 세계적으로 786병만 출시됐다. 그밖에 ‘리차드 헤네시’ 공병은 지난해 3월 50만 원대에서 올해 70만 원대까지 올랐으며 ‘맥켈란 21년산’은 2019년 3만 원에서 올해 10만 원대까지 가격이 상승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술을 사지 못할 경우 공병이라고 구매해 일종의 과시를 나타내고 추후 팔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 같은 신종 투자 기법이 등장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정소영 기자 upjs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