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약물 200배 농도 검출, 김연아도 이례적 비판…부담감 못 이긴 듯 실수 연발로 4위 마감
발리예바는 지난해 11월 2021 국제빙상경기연맹(ISU) 로스텔레콤컵 프리스케이팅에서 185.29점을 받아 여자 선수 최초로 180점의 벽을 넘었다. 같은 대회에서 받은 총점 272.71점 역시 여자 싱글 최초로 270점을 넘긴 세계 기록이었다. 지난 1월 2022 ISU 유럽피겨선수권에서는 쇼트프로그램에서 90.45점을 얻어 90점 장벽마저 허물었다. 피겨 여자 싱글 선수의 점프 기술은 발리예바를 통해 '넥스트 레벨'로 올라섰다.
당연히 올림픽에서도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다. 프리스케이팅에서 세 차례나 4회전 점프를 시도하는 발리예바는 이미 기술 요소 기본 점수에서 월등한 우위를 점하고 경기를 시작한다. 유럽선수권 프리스케이팅에선 두 번의 점프 착지 실수를 하고도 1위를 지켰을 정도다. '누가 올림픽 금메달을 딸 것인가'보다 '발리예바가 얼마나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인가'에 더 관심이 쏠렸다.
'피겨 여왕 대관식'의 전초전도 무사히 끝냈다. 발리예바는 지난 6일과 7일 피겨 단체전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에서 모두 1위에 올랐다. 프리스케이팅에서는 한 차례 넘어지고도 2위보다 30점을 더 받았다. 발리예바가 소속된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는 어렵지 않게 금메달을 땄다.
#16세 피겨 천재의 충격적 도핑 위반
발리예바를 둘러싼 기류가 달라진 건 그 다음 날부터다. 지난 8일 오후 10시 열릴 예정이던 피겨 단체전 시상식이 돌연 연기됐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9일 일일 브리핑에서 "ISU와 법적으로 논의 중인 돌발 사안이 생겼다"고 발표했다. 이후 여러 외신은 "ROC 선수들이 올림픽을 앞두고 진행한 도핑 검사 결과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했고, 러시아 언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리예바를 도핑 적발 선수로 특정했다.
그럼에도 IOC는 다음 날까지 "도핑 의혹 관련 보도는 현재 법적 논의가 진행 중인 사안이라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다. 최대한 빨리 매듭짓기 위해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말을 아꼈다. 세계반도핑기구(WADA)는 도핑 규정 위반 당시 미성년이었던 선수를 보호 대상자(Protected Person)로 분류하고, 16세 이하 선수를 18세 이하 선수보다 더 엄격하게 보호하고 있다. 2006년 4월 26일생인 발리예바는 아직 만 16세를 넘기지 않아 최고 수준의 보호를 받을 가능성이 컸다. 올림픽 소식을 전하는 온라인 매체 '인사이드 더 게임즈'는 "발리예바가 징계를 받더라도 16세 이상 선수보다 훨씬 가벼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IOC는 결국 피겨 단체전 시상식이 연기된 지 사흘째인 11일 정례 브리핑에서 "발리예바가 이번 대회 전 진행한 도핑 검사에서 금지 약물 양성 반응을 보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발리예바의 도핑 샘플에서 검출된 트리메타지딘은 협심증 치료제다. 운동선수의 혈류량을 늘려 지구력을 향상시키는 효과가 인정돼 2014년 1월부터 도핑 금지약물로 지정됐다.
발리예바는 자국 대회(러시아선수권)에 출전한 지난해 12월 해당 도핑 샘플을 제출했다. 그러나 검사 결과는 샘플 채집 후 한 달 반이 지난 이달 8일에야 러시아반도핑기구(RUSADA)에 통보됐다. ROC가 베이징올림픽 피겨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다음 날이었다. WADA는 이와 관련해 "직원 중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와 도핑 결과 확인이 늦어졌다"고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RUSADA는 결과 통보를 받은 뒤 발리예바에게 잠정적 자격 정지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발리예바가 이에 불복해 이의를 제기하자 하루 만에 징계를 철회하고 15일로 예정된 여자 싱글 출전을 허가했다. 베이징올림픽 도핑검사를 진행하는 국제검사기구(The International Testing Agency·ITA)와 IOC는 즉각 RUSADA의 결정에 반발했다. IOC와 ISU, WADA는 일제히 "RUSADA의 징계 철회가 부당하다"며 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제소했다.
러시아는 2019년 9월 국가 주도 도핑 스캔들에 휘말려 2020년 12월 CAS로부터 2년간 올림픽, 월드컵 등 주요 국제대회 출전을 금지하는 제재를 받았다. 다만 징계 범위가 국가 자격으로 제한돼 선수들은 ROC(러시아 올림픽위원회)라는 이름을 달고 올림픽에 출전했다. 유니폼에 러시아 국기를 달지 못하고, 금메달을 따도 국가를 틀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ROC 선수의 금지 약물 복용이 적발되자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다. 특히 발리예바는 세계 정상의 실력을 가진 베이징올림픽 최고 스타 중 하나라 파장이 더 컸다.
#예상을 뒤엎은 CAS의 결정
세계 스포츠인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CAS는 13일 밤부터 14일 새벽까지 약 6시간에 걸쳐 긴급 화상 청문회를 열었다. 이탈리아, 미국, 슬로베니아 국적의 CAS 위원 3명이 청문회 중재인으로 나섰고, 이해 당사자인 발리예바, IOC, WADA, ISU, RUSADA, ROC 관계자가 모두 참석해 각자의 주장을 폈다. 그리고 긴 논의를 끝낸 14일 오후, CAS는 "RUSADA가 발리예바의 선수 자격 정지 징계를 철회한 것과 관련해 IOC, WADA, ISU가 제기한 이의 신청을 모두 기각한다"고 발표했다. 발리예바가 피겨 여자 싱글 경기에 예정대로 나설 수 있다는 의미였다.
CAS는 "발리예바의 경기 출전을 허용한다. 도핑 위반 선수는 출전을 금지하는 게 의무조항이지만, 이번 사례는 충분히 예외가 인정된다"며 "선수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지 않는 선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징계를 내리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어 발리예바에 관한 이의 제기를 기각한 사유로 △나이가 16세 이하라 반도핑법으로 보호되는 점 △올림픽 기간에 진행한 도핑 테스트 결과가 아니라는 점 △WADA가 발리예바에게 도핑 결과를 너무 늦게 통보한 점 등을 꼽았다.
CAS 관계자는 "발리예바는 이번 올림픽에 출전할 경우 자신이 받게 될 피해를 미리 인지하지 못했다. 또 올림픽 기간에 결과가 통보돼 법적 대응을 할 시간이 없었는데, 이 점은 분명히 선수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못박으면서 "3명의 중재인이 오직 근거만을 바탕으로 심사했다. 국적이 모두 달랐고, 외부 압박도 받지 않았다"며 애써 공정성을 강조했다.
여론은 예상대로 나빴다. IOC와 WADA 관계자들은 올림픽 최연소 선수 발리예바 뒤에 숨은 ROC 코칭스태프와 관계자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데니스 오스발트 IOC 징계위원회 종신 위원장은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에서 "발리예바는 청문회에서 '할아버지가 복용하는 약물이 같은 물컵을 통해 섞여 (소변 샘플이) 오염됐다는 주장을 했다"며 "이 사건이 과거 러시아의 도핑 조작과 무관한 일이라 해도, 만 15세 선수가 혼자서 잘못을 저지를 순 없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위톨드 방카 WADA 위원장도 "미성년자에게 금지 약물을 제공한 사람들을 영구추방해야 한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실제로 뉴욕타임스는 "발리예바는 트리메타지딘 외에도 (금지 약물이 아닌) 심장 질환 치료제 기폭센과 L-카르니틴 양성 반응을 보였다"면서 "세계 정상급 젊은 운동 선수의 도핑 샘플에 세 가지 약물이 존재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보도했다. 기폭센은 지구력을 증가시키고 호흡 곤란을 없애는 효과가 있다. L-카르니틴은 체지방 감소에 도움이 되는 영양제다.
트래비스 타이거트 미국반도핑기구(USADA) 사무총장은 "피로도를 줄여 훈련 시간을 늘리고 호흡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약물의 조합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발리예바 혹은 그의 코치진이 다분히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방법으로 약물의 도움을 받아왔음을 강조한 것이다. 타이거트 총장은 또 "발리예바의 도핑 샘플에서 검출된 트리메타지딘의 농도는 1㎖당 2.1ng에 이른다. 다른 선수들의 샘플에서 볼 수 있는 농도의 200배에 해당하는 수치"라고 일축하면서 "발리예바가 경기력 향상을 위해 금지 약물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거듭 주장했다.
#원조 '피겨 퀸' 김연아도 화났다
선수들은 더욱 분노했다. 피겨 여자 싱글 한국 대표 김예림은 CAS 발표 후 첫 훈련을 마친 뒤 "대다수 선수는 발리예바의 출전을 좋지 않게 보고 있다. 한 미국 선수와 대화하면서 '우리 둘 다 발리예바의 연기를 무척 좋아하지만 경기 출전은 공정하지 않은 것 같다'는 얘기를 나눴다"고 전했다. 동계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2회 우승자인 카타리나 비트(독일)도 "이번 사건에 책임 있는 어른들은 모두 영원히 스포츠에서 추방해야 한다"며 주변 지도자와 의료진을 맹비난했다.
2010 밴쿠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피겨 퀸' 김연아마저 이례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김연아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검은 이미지와 함께 영어로 "도핑 규정을 위반한 선수는 경기에 참가할 수 없다. 이 원칙에는 예외가 없어야 한다. 모든 선수의 노력과 꿈은 공평하고 소중하다"고 썼다. 김연아가 영어로 SNS에 자신의 견해를 밝힌 건 지난해 12월 유니세프 창설 75주년 축하 이후 처음이다. 국제 스포츠계에 던지는 메시지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세계 최고의 피겨 선수였던 김연아의 소신 발언에 외신도 주목했다. 로이터 통신과 미국 폭스스포츠, CNN 등은 "밴쿠버 금메달리스트 김연아가 발리예바 사태와 관련해 '흔치 않은 발언'을 했다"며 김연아의 글을 인용 보도했다. 일본 닛칸스포츠도 "김연아가 발리예바 문제와 관련해 CAS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자 4시간 만에 15만 개 이상의 '좋아요'가 붙었고, 6000개 넘는 댓글이 달렸다"고 전했다.
김연아의 피겨 후배들도 직·간접적으로 동조의 뜻을 표현했다. 베이징올림픽 피겨 남자 싱글 5위에 오른 차준환은 기자회견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해 정말 안타깝다. 도핑 제도는 (정직하게 운동한)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스포츠에서는 깨끗함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2018 평창올림픽 여자 싱글과 페어에 각각 출전했던 최다빈과 김규은, 이번 대회 남자 싱글 대표 이시형 등도 김연아의 SNS 글을 공유하며 지지했다.
급기야 IOC는 발리예바를 정상 출전시킨 CAS의 결정에 강력한 카운터펀치로 응수했다. IOC는 14일 성명을 내고 "발리예바가 피겨 여자 싱글에서 3위 이내에 입상할 경우, 플라워 세리머니(간이 시상식)와 메달 수여식을 모두 열지 않겠다"며 "발리예바 사건이 마무리된 뒤 수상자들과 협의해 품격 있는 메달 수여식을 개최할 것"이라고 밝혔다. 발리예바의 수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향후 발리예바의 메달이 박탈될 가능성까지 미리 대비하겠다는 메시지나 다름없다.
IOC는 또 "발리예바가 쇼트프로그램에서 상위 24위 안에 들어 프리스케이팅 진출 커트라인을 통과한다면, 공정성을 위해 쇼트프로그램 25위 선수도 프리스케이팅에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ISU에 요청했다. ISU 역시 IOC의 제안을 곧바로 수락했다. '출전해선 안 되는 선수'가 출전함으로써 다른 선수가 기회를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의지다.
그래도 발리예바는 꿋꿋했다. 도핑 논란이 한창 진행 중일 때도 매일 정상 훈련을 소화하며 간간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15일 중국 베이징 수도체육관에서 열린 피겨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도 정상 출전해 기술 점수 44.51점과 예술 점수 37.65점 합계 82.16점을 받아 1위로 쇼트프로그램을 마쳤다. 한국의 유영 바로 앞 순서로 나선 발리예바는 첫 점프인 트리플 악셀 착지 과정에서 중심을 잃어 두 발로 내려왔지만, 다른 요소를 모두 완벽하게 연기했다. 경기를 마친 뒤엔 감정이 북받치는 듯 울먹였다. ROC 관계자들과 러시아 관중이 발리예바에게 환호와 기립박수를 보내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세계 각지의 차가운 시선은 피할 수 없었다. 올림픽 메인 중계사인 미국 NBC 캐스터는 발리예바의 쇼트프로그램 경기가 끝나자 "이 장면을 시청자께 보여드리게 돼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피겨 레전드인 NBC 해설자 타라 리핀스키와 조니 위어도 "봐서는 안됐던 스케이팅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게 불편하다"고 동조했다. 특히 리핀스키는 "이전까지 내가 이 선수(발리예바)를 얼마나 극찬했는지, 많은 사람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발리예바가 올림픽에서 쇼트프로그램 연기를 했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라고 했다.
국내 해설진도 다르지 않았다. 이호정 SBS 해설위원과 곽민정 KBS 해설위원은 발리예바의 쇼트프로그램 경기 내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위원은 경기 후 "도핑 위반을 하고도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 경기에 해설을 할 수 없었다. 열심히 훈련해 정정당당하게 올림픽 출전권을 따낸 선수들의 노력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곽 위원도 "하고 싶은 말이 없다. (도핑 관련한) 많은 논란을 책임지려면, 선수 스스로 출전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지적했다.
어쨌든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발리예바는 1등을 하고도 무거운 침묵 속에 경기장을 빠져나갔고, ISU는 쇼트프로그램 25위에 오른 제니 사리넨(핀란드)에게도 피겨스케이팅 진출권을 줬다. "이번 동계올림픽이 발리예바 사건으로만 기억되질 않기를 바란다"던 마크 애덤스 IOC 대변인의 희망은 이뤄지기 어려울 듯하다.
17일 저녁 이어진 프리스케이팅에서 마지막 순서로 출전한 발리예바는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넘어지는 장면이 세 차례나 나왔고 연기를 마치고선 끝내 눈물을 흘렸다. 141.93점을 받으며 쇼트 프로그램에서 1위에 올랐음에도 합계 점수 224.09점으로 4위에 올랐다. 비록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발리예바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