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파판정 논란 반중정서 심화, 외교정책 프레임 대선 변수 격상…“여당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2월 4일부터 2월 20일까지 16일 일정으로 진행됐다. 대선은 3월 9일 치러질 예정이다. 동계올림픽이 폐막한 뒤 17일이 지나면 대선이 열린다. 이번처럼 전국단위 선거를 코앞에 두고 메가 스포츠 이벤트가 펼쳐진 전례는 없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대선 관련 주요 이슈가 동계올림픽에 묻힐 가능성이 있는 데다, 경기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외교적 이슈와 맞물릴 수 있기 때문에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계속 꿈틀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이번 올림픽의 국내 정치적 의미를 설명했다.
임기 말에 접어든 문재인 정부 입장에선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메시지를 전달할 마지막 찬스로 여겨왔다. 그러나 이런 구상은 올림픽이 시작되기 한 달여 전 물거품이 됐다. 북한이 2021년 펼쳐진 도쿄올림픽에 이어 베이징 동계올림픽 불참을 선언하면서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김여정 조선노동당 부부장이 함께 경기를 관람하는 ‘정치적 그림’을 다시 그릴 경로가 원천 차단된 셈이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통한 ‘남북 평화무드’ 조성 구상은 실현 불가능한 과제가 됐다. 그 가운데 대회 시작과 동시에 변수가 터졌다. 한복을 둘러싼 ‘문화공정’ 논란과 중국 선수에 유리한 편파판정 논란이 잇따라 불거지면서 반중정서가 뜨겁게 타올랐다.
2월 4일 열린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선 한복을 입은 여성이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이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전달하는 퍼포먼스에 등장하면서 ‘한복공정’ 논란이 불거졌다. 개막식부터 반중정서에 불을 지피는 퍼포먼스가 나왔다.
쇼트트랙 남자 1000m 종목에서 나온 편파판정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공분을 샀다. 한국 쇼트트랙 남자 국가대표 황대헌과 이준서는 준결승 각각 다른 조에서 중국 선수와 경합 도중 석연찮은 실격 판정을 당했다. 결승에선 헝가리 쇼트트랙 국가대표 류샤오린 산도르가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한 뒤 실격 판정을 받아들여 중국 쇼트트랙 국가대표 런쯔웨이와 리원룽이 금메달과 은메달을 석권했다.
런쯔웨이가 금메달을 딴 뒤 코치박스에서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 코칭스태프는 주먹을 움켜쥐며 환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중 한 사람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 총감독이었던 김선태 감독이었다. 러시아로 귀화한 빅토르 안(한국명 안현수)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 코치도 기쁨을 함께 만끽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판정과 한국 출생 코칭스태프가 환호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반중정서는 극에 달했다.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최용구 한국 쇼트트랙 국가대표 지원단장은 2월 8일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오심이 반복되면 그것은 고의”라면서 쇼트트랙 남자 1000m 종목에서 나온 편파판정 논란을 직격하는 소신발언을 했다.
반중정서가 극에 달하자 대선 후보들의 입도 바빠졌다. 2월 7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베이징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편파판정에 실망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면서 “우리 선수들이 기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2월 8일 취재진과 만나 “이번 올림픽 상황을 보고 우리 아이들이 공정이라는 문제에 대해 많이 실망하지 않았을까 걱정된다”면서 “우리 선수들의 그 분노와 좌절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선수들에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는 소셜미디어롤 통해 “중국은 더티(dirty) 판정을 즉각 취소하고 대한민국의 금메달을 돌려줘야 한다”면서 “쇼트트랙 편파판정으로 우리 선수들의 금메달을 도둑맞았다”고 강한 비판 논조를 내세웠다.
2월 9일 중국 매체 시나스포츠는 대한체육회가 쇼트트랙 편파판정 논란과 관련해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 제소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전하며 “대선을 겨냥해 국민들이 화풀이를 하도록 하는 행태일 뿐”이라는 황당한 분석을 내놨다. 2월 11일 중국 관영매체 환구시보의 영문판 글로벌타임스는 “일부 (한국) 대선 후보자들부터 서방까지 이번 논란을 기회 삼아 한중 관계를 이간질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사뭇 다른 방식으로 반중정서에 대응했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개최국에 유리한 것을 넘어서 개최국 독식이란 말이 나올 것”이라면서 “89개국이 참가한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중국 체육대회’라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공정한 심판이 중요하다”고 했다. 올림픽에서의 공정한 판정을 촉구하는 데에 주안점을 뒀다.
이양수 국민의힘 선대본부 수석대변인은 “올림픽 정신을 무시한 수준을 넘어 중국이란 나라의 국격을 의심케 한 파렴치한 행태”라면서 “우리 정부 여당에도 촉구한다. 지난 5년 동안 중국에 기대고 구애해온 친중 정책의 대가가 무엇인지 성찰하길 바란다”고 했다. 이 수석대변인은 ‘중국의 국격’과 ‘정부 여당의 친중 정책’이라는 워딩을 활용하면서 현 정부의 대중 외교정책을 끄집어냈다.
크고 작은 선거판에 잔뼈가 굵은 선거 전략가들은 이런 흐름과 관련해 ‘선거 프레임이 네거티브에서 외교 정책으로 옮겨올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한 선거 전문가는 “지금까지 대선 후보 배우자를 중심으로 한 네거티브 선거전이 활발했다면, 이번 올림픽 편파판정 논란을 계기로 반중정서가 격화하면서 외교 정책에 대한 국민 관심이 높아진 양상”이라면서 “선거전이 본격화한 상황에서 누가 변화한 프레임에 더 효과적으로 대처하는지에 따라 향후 판세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선거 전문가는 “2002년 미국 쇼트트랙 국가대표 안톤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으로 반미감정이 불거졌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면서 “이번 동계올림픽은 선거운동 기간과 맞물려 있다. 그런데 전국민의 공분을 살 만한 이슈가 스포츠 쪽에서 터진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스포츠는 가장 직관적으로 국민 여론을 들끓게 하는 이벤트인데, 반중정서 불길이 각 정당이 보여 온 외교적 지향점까지 번질 수 있는 까닭에 각 캠프가 대응방안을 고심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치평론가 신율 명지대 교수는 “지금까지 국민 자부심을 고양하는 스포츠 메가 이벤트는 여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해 왔다. 더구나 이번 동계올림픽은 대선과 완전히 딱 맞물려 있는 흔치 않은 케이스인데 양상이 조금 다르다”면서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과 한일월드컵은 반미정서와 국민 자부심을 동시에 고취시키면서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지금은 국민적 자부심보다 반중정서가 더 지배적인 형국이라 되레 여당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