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서 작년 5연승 이어 올해 4연승 ‘2연패’ 이끌어…커제 “이게 사람의 바둑인가”
그렇다. 지금 세계 바둑계는 좋든 싫든 신진서를 빼놓고는 설명이 안 된다. 그를 응원하는 한국 팬들은 새로운 스타의 출현에 환호하지만 우리의 바둑 라이벌 중국과 일본은 이창호 9단, 이세돌 9단의 전성기와 같은 궤적을 보이고 있는 신진서의 활약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음은 물론 깊은 좌절감까지 맛보고 있는 중이다.
신진서 9단이 농심신라면배에서 2년 연속 자신의 손으로 한국의 우승을 확정지었다. 2라운드까지 일본 3명(이야마 유타 9단, 위정치 9단, 이치리키 료 9단) 중국 2명(미위팅 9단, 커제 9단)이 남은 데 비해 한국은 주장 신진서만 생존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3라운드에 등장한 신진서는 이야마 유타를 꺾은 미위팅을 시작으로 위정치, 커제, 이치리키 료를 차례로 눕히고 4연승으로 제23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우승을 결정지었다. 지난해 대회 막판 5연승에 이은 2년 연속 ‘슈퍼 마무리’다.
신진서의 활약으로 한국은 농심배 2년 연속 우승 포함 통산 14번째 우승컵을 들어 올렸으며 우승 상금 5억 원도 품에 안았다. 한편 16년 만에 농심배 두 번째 우승을 노렸던 일본의 꿈은 마지막 주자 이치리키가 신진서의 벽을 넘지 못하며 좌절됐다.
최근 신진서의 바둑을 해설하는 프로기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건 도저히 인간의 바둑이 아니다. 상대 기사들이 바둑이 끝난 후 집에 가서 인공지능을 이용해 복기해본다면 모두 깊은 좌절감에 휩싸일 것 같다”고 말한다. 그만큼 신진서의 바둑 내용이 압도적이라는 얘기다. 신진서 역시 우승이 확정된 후 “이번 농심배는 체력적으로 힘들었을 뿐 네 판 모두 내용적으로는 어렵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우승 결정국이었던 최종국은 초반 포석은 팽팽하게 출발했지만 하변 붙임(백64)부터 앞서가기 시작했다. 백 넉 점을 사석으로 활용해 약한 돌을 깔끔하게 정비한 신진서는 이후 ‘신공지능’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안전하게 바둑을 마무리하며 이치리키의 항서를 받아냈다.
한국 우승을 확정지은 후 가진 인터뷰에서 신진서는 “초반 진행은 마음에 들었지만 후반 추격을 허용한 게 조금 아쉽다”면서 “계속 승리하며 기세는 좋았지만 연일 대국이 계속되며 피곤함이 쌓였던 것이 이유였던 것 같다. 다행히 시간이 좀 남아 있어 마무리를 잘할 수 있었다”고 최종국을 돌아봤다.
신진서는 이어 “미위팅 9단과의 첫 대국이 불리하게 시작되며 우여곡절 끝에 재대국이 나오는 등 너무 힘들게 시작했지만 바둑팬들의 성원이 큰 힘이 됐다. 농심신라면배 우승으로 부담을 던 만큼 올해 있을 세계대회와 아시안게임에서도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내고 싶다”는 각오를 전했다.
신진서의 인터뷰 내용대로 이번 농심배 재대국은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미위팅과의 대국을 시작한 지 2시간 30분쯤 신진서가 167번째 수를 두었을 때 대국자 화면에서 갑자기 흑을 든 신진서의 시간승 메시지가 떴다. 초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하던 미위팅이 마지막 10초를 남기고 마우스를 클릭했으나, 컴퓨터는 착점이 되지 않았다고 인식한 것. 하지만 미위팅은 이를 두고 “초읽기 아홉 이전에 마우스를 클릭했으나 착점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대국 전 장면을 녹화하고 있는 주최 측이 정확한 판정을 위해 비디오 판독을 했고, 이 판독 결과를 두고 한국기원과 중국바둑협회가 이견을 보이면서 오랫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한국기원은 대국이 중지된 지 3시간 30분이 지난 시점에서 “판독 결과 판정위원단은 시간패라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지만 중국은 정밀 비디오 판독을 통한 재판정을 요구했다”면서 “이에 정밀 판독을 다시 했고 결과를 도출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일본의 의견을 구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결국 일본기원의 중재로 재대국으로 결론이 났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튿날 열린 재대국은 이미 알려진 대로 신진서가 미위팅의 대마를 포획하며 통쾌한 불계승으로 막을 내렸다.
농심배에서 재대국은 이번이 두 번째다. 2020년 제21회 대회 박정환-판팅위 전에서 한 차례 나온 바 있다. 당시 상황은 좀 달라서 박정환 9단이 시간 안에 착점을 했지만 착점이 되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했고 비디오 판독 결과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판정되어 재대국으로 결정됐었다(이 역시 재대국에서 박정환 9단 승리).
한편 신진서의 연승을 막지 못하고 3위로 내려앉은 중국의 주장 커제 9단은 대국 후, 자신의 SNS(소셜미디어)에 한탄하듯 자신의 감정을 털어놔 눈길을 끌었다.
커제는 “이게 정말 인간의 바둑인가. 신진서와의 바둑을 분석해보니 전체 대국에서 AI(인공지능)와 무려 71%의 일치율을 보였다. 신진서의 착점은 단 한 번도 문제가 없었다. 이번 대국의 신진서는 내가 과거 상대했던 알파고보다도 더 강했다. 믿을 수 없다”면서 “너무 어렵다. 나는 지금 매우 고통스럽지만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수준의 실력은 너무 강해서 나를 좌절하게 만든다”고 한탄했다.
다만 커제는 말미에 “신진서가 결정적인 장면에서 자주 자리를 비웠다”면서 마치 신진서가 부정행위를 했다는 투의 글을 암시해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글을 접한 중국 바둑팬들마저 “커제가 평소 연습보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실력이 예전만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고, 패한 뒤 핑계와 변명만 일삼고 있다”며 오히려 힐난했다. 신진서 9단 역시 “커제 9단 발언이 의도하는 바는 알 수 없지만 중국팬들에게 오해를 부를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조심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