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범 혐오하는 소년부 판사로 열연…“이상적인 판사 배역에 생명 부여한 김무열, 참 좋은 배우”
“이런 소재는 사실 만드는 사람뿐 아니라 이걸 접하는 시청자들에게도 굉장히 예민할 수 있거든요. 저는 처음에 작품 제안을 받고 이 작품이 소년범과 소년범죄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뭔가 고민하게 하는, 그런 화두를 던진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피해자와 가해자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굉장히 다각적인 시선에서 객관적으로 접하게 하는 구성이 참 좋더라고요. 또 자극적인 장치나 기교를 다 배제하고 인물들의 대사 등으로 작품의 메시지를 보여준다는 점이 굉장히 맘에 들어 이 작품을 정말 잘 해내고 싶었어요.”
2월 25일 공개된 ‘소년심판’은 말 그대로 소년범들의 범죄에 초점을 맞춘다. 이제까지 어른들 뺨치게 악랄해지는 아이들의 범죄를 보고 분노한 대중들은 그들에게 어른과 똑같은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런 대중에게 ‘소년심판’은 질문을 하나 던진다. “과연 아이들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것이 온당한가. 당신과 우리의 잘못은 없을까.”
“촬영 전에 만나 뵀던 판사님이 하신 얘기가, 많은 분들이 인식하고 있는 소년범죄의 강력사건은 전체 청소년 범죄의 1%에 해당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비중을 떠나서 체감하는 게 그 이상이라서 이런 강력 사건 때문에 전체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는 것을 굉장히 경계하셨어요. 어른들은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범죄로 내몰릴 수밖에 없도록 자신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한 어른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극 중 김혜수는 연화지방법원 소년형사합의부 우배석판사 심은석을 연기한다. 보호처분 중 가장 무거운 처분인 10호 처분을 가장 많이 내린다고 해서 ‘십은석’이란 별명이 붙은 그는 소년범을 혐오하는 소년부의 판사다. 그 나이에, 감히, 그런 범죄를 저지르고도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르지 않는 소년범들을 향한 혐오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건의 해결 건수라는 절대적인 수치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 현 소년 재판의 한계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아이에게 무관심한 가정과 사회, 그리고 속도와 수치에만 집중하는 법관들이, 아이들이 죄를 반복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소년범을 다루는 법관이 어떻게 ‘소년범을 혐오한다’는 대사를 할 수 있나 싶죠. 하지만 이야기를 지켜보고 있으면 은석은 범죄자에 대해 어떤 선입견도 갖지 않고 단지 법조인으로서, 어른으로서 책임을 다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사실 은석은 소년 범죄의 피해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어째서 이런 사안을 시간의 속도로만 해결하려고 할까 하는 의문을 보여주죠. 이게 실제 법조계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거든요. 전국 소년부 판사의 숫자는 20명 정도인데 그분들이 1년에 3만 건 이상의 사건을 해결해야 해요. 그렇게 해결하고 판결해야 할 다음 사건이 있고 동시에 그 많은 업무를 몇 명 안 되는 판사들이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간과할 수밖에 없는 이면의 많은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것 같아요.”
은석의 신념은 소년범의 죗값을 단순히 소년범 한 명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그를 만들어낸 가정, 그를 소외한 사회에게 조명을 비추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선 서면만으로 사건을 판단하고 덮고자 하는 윗선들을 들이박을 준비도, 거칠어진 소년범들과 몸으로 맞부딪칠 준비도 돼 있다. 누군가는 회사로 따지면 부하직원인 은석이 상사에 해당하는 강원중 부장판사(이성민 분), 나근희 부장판사(이정은 분)에 맞서며 항명하는 모습을 의아하게 지적하기도 했지만 김혜수는 “그렇기에 심은석”이라고 말했다.
“주인공이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직속 상사에게 대들고, 대립한다. 이런 것보다 선제돼야 하는 건 은석이 가진 법조인으로서의 신념이에요. 그 신념이 법을 어긴 소년범에게 은석이 보여주는 태도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상대가 누구든 바뀌지 않는 거죠. 사실 (강원중을 좌천시켰을 때) ‘야, 그렇다고 해도 부장판사를 그렇게 보내버려야 되니?’ 이런 말도 들었는데(웃음). 신념이 상대나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라면 그건 신념이라고 볼 수 없으니까요.”
그러면서도 김혜수는 실제로 함께 일한다면 가장 불편하게 느껴질 판사로 심은석을 꼽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실제로 극 중 등장하는 판사 4명 가운데 심은석을 포함한 3명이 ‘강성’이다. 소년법 개정이란 오랜 숙원을 이루기 위해 국회 입성을 앞두고 있는 강원중 부장판사, 인원 부족으로 재판에서 속도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나근희 부장판사, 그리고 그 둘의 잘못된 처사에 끝까지 고개 숙이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는 심은석까지. 그런 이들 가운데 아이들 스스로의 교화 능력을 믿으며 지원하는 차태주 판사(김무열 분)는 가장 이상적인 소년재판 판사로 존재한다. 매파들 사이에 유일한 비둘기파로 고군분투한 김무열을 가리켜 김혜수는 “김무열이 연기했기에 차태주라는 사람에게 생명이 부여됐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무열 씨를 만나며 굉장히 많은 걸 배운 게 사실 저희 4명의 판사 중 3명이 엄청난 강성이잖아요. 그런데 차태주만 톤을 달리하거든요. 이런 강성 캐릭터들과 함께 연기하고 부딪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상대의 톤만큼 피치를 올리기도 하는데 김무열 씨는 정말 작품 전체를 보고 이 캐릭터에 숨겨진 디테일을 하나하나 구현해서 4명의 판사들의 균형감을 맞춰줬어요. 참 좋은 배우예요.”
‘소년심판’은 작품이 공개된 뒤에도 한참 동안 김혜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시청자들에게 내어준 화두가 배우들의 머릿속에도 쉽게 잊히지 않고 있었다. 자신도 만족할 만한 답을 찾는 것은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김혜수는 그 과정조차도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시청자들의 반응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같은 의견에 기뻐하고, 다른 의견은 받아들이는 과정은 매년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새로움이었다.
“‘소년심판’을 촬영하고 나서 이제까지 굉장히 무섭게 느끼고 충격을 받았던 소년범죄 같은 사회 현상에 대한 나의 관심이나 방향이 얼마나 감정적으로 편협했는지 많이 반성하게 됐어요. 제가 관심을 주고 있다 생각한 게 관심이 아닌 그저 어떤 현상에 대한 분노나 슬픔, 안타까움에 그쳤을 뿐이란 걸 깨닫게 된 거죠. 많은 시청자 분들이 작품을 보시고 각자 의견들을 이야기해주시는데 그런 게 이 작품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가장 바랐던 것이거든요. 그저 흥미나 재미로 남는 작품이 아니라 정말 한번쯤 저희의 역할과 그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그런 반응들이 있다는 데 감사한 마음이 너무 커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