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막힌 야권 대통합 ‘물꼬’ 텄다
▲ 지난 6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단일화에 관한 기자회견을 연 가운데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들어 그에 대한 관심도를 짐작케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카메라의 플래시 세례 속에 입장한 안 원장이 “박 변호사님이 우리 사회를 위해 헌신하면서 시민사회 운동의 새로운 꽃을 피운 분으로 서울시장직을 누구보다 잘 수행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히면서 두 사람 사이에 내려진 결론은 분명해졌다. 멀게는 지난해 6·2 전국동시지방선거 직후부터 추진돼 온 범야권 대통합 운동의 첫 작품이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합의 당사자뿐 아니라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에선 이날 두 사람의 단일화를 ‘아름다운 합의’라고 평가했다. 반(反)한나라당 전선을 분명히 하기 위해 어떤 조건도, 다툼도 없이 대승적인 결단에 이르렀다는 데 대한 평가다. 이는 안-박 단일화의 영향이 서울시장 보선에 국한되지 않고 범야권 대통합 운동에까지 미칠 것이란 전망을 가능케 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실제로 안-박 단일화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의미를 갖는다. 우선 두 사람의 단일화 합의가 범야권 통합 운동과 관련한 첫 번째 가시적인 성과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이날 합의는 북한에 대한 인식 차를 빼곤 정체성 면에서 별 차이도 없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이 무산된 뒤에 나왔다. 동시에 진보 시민사회 세력이 주축이 된 범야권 대통합 추진기구 ‘혁신과 통합’의 호소도, 민주당의 대통합 제안도 ‘메아리 없는 외침’에 그치고 있을 때 나온 합의이기도 하다. 기존 야당들이 정파주의와 기득권 집착, 상호 불신에 사로잡혀 지리멸렬해가고 있는 동안 정치권 밖에 머물러 온 안 원장과 박 상임이사가 범야권 대통합의 물꼬를 튼 셈이다. 비 정치인 두 명이 꺼져가던 범야권 통합운동의 불씨를 살려놓은 것이다.
여론조사상 지지율 50%의 후보(안철수)와 5% 후보(박원순) 간의 단일화 협상에서 5% 후보가 선택되고, 그것도 아무런 잡음이나 다툼도 없이 그야말로 ‘아름다운 합의’가 이뤄졌다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안 원장은 회견에서 서울시장 보선 출마를 포기한 이유에 대해 “자격 있는 분의 출마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자격 있는 사람이 출마하겠다고 하니 상대적으로 자격이 좀 떨어지는 자신은 물러나는 게 상식에 맞다는 얘기다. 그에게 여론조사 수치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안 원장은 그러면서 마치 국민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듯 박 상임이사를 꼭 끌어안아 줬다.
▲ 안철수 교수와 단일화를 이룬 박원순 변호사(왼쪽)와 이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린 박경철 원장. |
한나라당 후보의 당선을 막아야 한다는 대의를 위해 양보하고 헌신하는 이들의 모습은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등 범야권 정당들에게도 적잖은 압박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비정치인들도 이처럼 대의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데 대통합의 주체랄 수 있는 정당들이 자기 주장만 늘어놓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혁신과 통합’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김기식 ‘내가 꿈꾸는 나라’ 공동대표는 이에 대해 “현재의 정당질서를 재편해 한나라당과 1대1 대결구도를 만들지 않는다면 결코 국민의 마음과 지지를 얻을 수 없다”면서 “안 원장과 박 상임이사가 범야권 대통합 정당 건설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무기력증에 빠진 민주당, 국민들 관심 밖에 있는 진보정당 모두 혁신과 통합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박 단일화의 주인공 두 사람이 닳고 단 기성 정치인이 아닌 데다 국민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춘 인물이라는 점도 단일화의 의미를 한층 증폭시키는 요인이다. 범야권 대통합 운동을 펼쳐 온 ‘혁신과 통합’도, 민주당 등 다른 야당들도 꼭 풀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왜 범야권 대통합이 필요한지, 다시 말해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와 제18대 대통령선거에서 왜 한나라당 정권을 심판해야 하는지 국민들을 납득시키는 게 그것이다.
지난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에서 시작된 야권의 반복적인 이합집산은 국민들에게 피로감을 줬을 뿐 어떠한 감동도 주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 결과가 2007년 대선에서 진보진영의 참패로 나타났다. 지금 이 시점에도 적지 않은 국민들이 어차피 또 갈라설 가능성이 있는 정당들끼리 왜 통합을 하겠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중적 인기와 영향력을 갖춘 두 사람의 의기투합은 한나라당과 범야권의 경쟁 구도에서 범야권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될 가능성이 높다. 두 사람이 통합 필요성에 대한 의문과 회의론을 잠재우고 범야권 대통합론, 한나라당 정권 심판론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것이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안-박 단일화는 전통적인 야권 지지층뿐 아니라 여론조사상 30∼40%에 달하는 무당파층, 특히 기성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젊은 층에 확실한 사인으로 다가갈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물론 ‘천하의 안철수나 박원순’이 아무리 재주를 부린다 해도 범야권 대통합을 실현시킬 주체는 어디까지나 야당들이다.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수 있어도 말이 물을 마시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이다. 비정치인들의 욕심 없는 헌신이 정치권의 기득권 포기와 쇄신으로 이어질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