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 나를 변화시키진 않아” 재충전 후 ‘도그데이즈’ 촬영…공개 앞둔 신작 ‘파친코’도 ‘1인치 장벽’ 넘을까
3월 18일 애플TV 플러스(+) 신작 ‘파친코’를 소개하기 위해 화상 인터뷰를 통해 국내 취재진과 만난 윤여정에게는 아카데미 수상 이후 달라진 그의 삶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정작 윤여정은 “30, 40대에 탔으면 둥둥 떠다녔겠지만, 지금은 똑같은 친구랑 놀고 같은 집에 산다. 내 나이에 감사해본 건 처음이지만, 이 상이 나를 변화시키진 않는다. 그냥 나로 살다 죽을 것”이라고 그다운 답변을 내놨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와 주변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지금껏 그가 걸어왔던 길을 묵묵히 걷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윤여정, 아카데미 그 후…
윤여정의 아카데미 수상은 극적이었다.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됐고, 단박에 수상에 성공했다. 시상자는 ‘미나리’의 제작자이기도 한 할리우드 톱배우 브래드 피트였다. 수상대에 오른 노배우는 유창한 영어로 한없이 자신을 낮추며 여우조연상 후보 모두를 챙기는 소감을 들려줬다.
이 상을 두고 경쟁한 어맨다 사이브리드는 윤여정의 수상 소감에 ‘아이 러브 허’(I love her)라고 나지막이 외치며 눈시울을 붉혔다. CNN, 뉴욕타임스 등도 “윤여정이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타전했고, ‘K-할머니’라는 키워드가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윤여정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를 칭송하는 기사가 쏟아지고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정작 윤여정은 조용했다. 예정됐던 tvN 예능 ‘윤스테이’ 활동 외에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혹자는 ‘모습을 감췄다’고 표현했다. 이는 편협한 생각이다. 윤여정은 일상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해외를 돌며 ‘미나리’ 촬영 및 개봉 일정을 소화하고 ‘파친코’ 촬영 등으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 윤여정은 아카데미 후 휴식기를 가졌다. 언제나 그랬듯, 또 다른 이슈가 샘솟았고 여론과 언론의 관심 역시 다른 곳을 향했다. 그 안에서 윤여정은 조용히 재충전의 시간을 보냈고, 2021년 12월 다시 촬영을 시작했다. 윤여정이 출연한 2018년작 ‘그것만이 내 세상’의 조연출을 맡았던 김덕민 감독의 데뷔작 ‘도그데이즈’다.
이 영화는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동물병원에서 반려견을 통해 연결된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고 위로하며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를 그렸다. 윤여정 외에 유해진, 김서형, 김윤진, 정성화 등이 참여하는 옴니버스 영화다. 윤여정은 반려견 완다와 단둘이 살고 있는 건축가 여정 역을 맡았다. ‘도그데이즈’는 소위 말하는 ‘원톱 영화’가 아니다. 윤여정은 여러 배우들과 함께 ‘원 오브 뎀’(One of them)으로 자리했다. 아카데미 이후 그가 쓴 왕관에 합당하는 주장도, 요구도 없다. 그게 윤여정이 사는 방식이다.
그리고 ‘파친코’ 공개시기에 맞춰 그는 홍보 일정에 참여하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갔다. 올해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는 시상자로 참여한다. 이런 일정을 마친 뒤에는 그에게 예능이라는 새로운 길을 열어준 나영석 PD가 연출하는 또 다른 예능에 참여한다. ‘윤식당’, ‘윤스테이’를 함께했던 후배 배우 이서진도 동행한다. 윤여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셈이다.
#변함없는 윤여정의 책임감
‘미나리’는 미국으로 이민 간 한국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렸다. 극 중 윤여정은 미국에서 힘겹게 사는 딸을 위해 기꺼이 언어도 통하지 않는 미국으로 건너가는 순자 역을 맡아 전통적인 한국의 엄마상을 보여줬다. 장난꾸러기 손자를 향해 내리사랑을 실천하며 모든 것을 바치는 그의 모습에 전 세계인이 감동했다. 그는 ‘미나리’라는 작품 안에서 하나의 역할을 보여줬을 뿐이라지만, 이를 본 이들의 뇌리에는 한국 할머니에 대한 깊은 인상이 각인됐다.
이후 윤여정의 선택은 ‘파친코’였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해 한국, 일본, 미국을 오가며 지난한 삶을 살았던 당시 한국 이민자 가족의 80년에 걸친 이야기를 다룬 대서사시다. 윤여정은 극 중 주인공 선자의 노년기를 연기했다. 왜 그는 ‘파친코’를 선택했을까.
“자이니치(재일조선인)라는 단어에 부정적 뉘앙스가 있는 줄 알았다. 우리가 독립하자마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정부가 한국에 있는 국민들을 먼저 구제하려다보니 해외동포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자이니치는 한국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어딘가에 동떨어지게 된 거다. ‘자이니치’에는 재일동포지만 한국인으로 산다는 뜻이 있다고 하더라. 자이니치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부심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번 작품을 찍으면서 가슴 아팠다.”
윤여정의 손자 솔로몬 역을 맡은 배우 진하는 윤여정을 “마스터”라고 불렀다. 평생을 연기에 투신한 대선배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윤여정은 “나를 마스터라 부르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의 배우로서 어우러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하지만 작품을, 연기를 선보이는 그의 자세만큼은 이미 마스터 반열에 올랐다. ‘파친코’를 선보이며 그는 재차 당부했다.
“봉준호 감독이 1인치 장벽을 넘으면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이 작품을 통해) 같이 많은 얘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