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1년 만에 첫 누아르 도전장…“90년대 전문배우? 향수 자극하는 이유 나도 궁금해”
“현장에 제작진 분들이 늘 배우들에게 힘을 주려고 이 신 너무 좋다, 연기가 너무 좋다며 응원해주시고 격려해주셨는데 그것에 심취해 있을 순 없었어요. 그렇게 힘을 주시는 말들이 사실 제겐 들리지 않았거든요. 그만큼 큰 성장통을 준 그런 작품이었어요, ‘뜨거운 피’는.”
3월 23일 개봉한 영화 '뜨거운 피'의 무대는 정우의 캐릭터가 가장 빛날 수 있는 1990년대와 부산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부산 변두리의 작은 포구 '구암'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손 영감'(김갑수 분)의 토착 세력과 영도파 건달들의 세력 다툼이 이야기의 큰 줄기를 이룬다. 구암의 절대적인 주인 손 영감의 손발이 돼 수년간 일해 온 토착 건달 ‘희수’가 정우의 첫 누아르 캐릭터다.
“부산이라는 배경에서 정우의 서사, 정우의 누아르를 보여줄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사실 머리로 선택했다기보단 가슴으로 선택한 작품이죠(웃음). 이것저것 따지고 들고, 이럴까 저럴까 생각했다면 정우가 아닌 다른 희수가 나왔을 것 같아요.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정우만의 새로운 누아르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포구 사람들에겐 ‘삼촌’으로 불리며 해결사 역할을 도맡고, 손 영감을 대신해 지저분한 일에도 거리낌없이 나서는 희수는 조직의 오른팔 그 이상의 인물이기도 하다. 손 영감과의 믿음으로 시작된 관계지만 한탕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정체된 삶을 살아가는 것에 불안함을 느끼는 희수에게 구암을 노린 영도파 건달이 접근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개인의 갈등에서 조직 간의 전쟁으로 비화한다.
욕망에 흔들리는 희수의 모습은 스크린에 그대로 스며든 것처럼 미묘하게 변해간다. ‘희수 삼촌’ 시절 빛바랜 가죽 재킷과 더벅머리, 정돈되지는 않았어도 여유로워 보였던 그는 맞춘 것 같은 슈트를 입고 단정하게 머리와 수염을 정리한 뒤에는 오히려 무언가에 쫓기는 듯 퀭한 모습이다. 충혈된 눈과 꺼칠해진 얼굴로 스크린 너머 관객들을 빤히 바라볼 때는 소름이 돋을 정도다. 정우는 그런 희수의 변모를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넘어가도록 연기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감독님이랑 제작진 분들은 희수가 술과 담배에 ‘쭬어’ 있는 모습이길 바랐어요. 그냥 절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쭬어’ 있는 캐릭터를 원하셔서 촬영하느라 잠을 못 자 눈이 충혈돼 있고 얼굴이 푸석푸석해 있으면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눈이 멀쩡한 날엔 내 손으로 눈을 찔러야 되나 싶을 정도로(웃음). 그때 정말 열정적으로, 뜨겁게 연기했던 것 같아요. 근래 들어 가장 뜨거웠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조금 여유 있게 온기를 찾고 싶은 타이밍일지도 몰라요(웃음).”
희수의 변화를 이끌어낸 숨은 주역, 용강(최무성 분)의 열연도 ‘뜨거운 피’를 수작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무성은 검은 양복을 입고 점잔을 떠는 건달패 속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돌아버린 ‘미친 개’ 역할을 소화해 냈다. 그런 최무성의 캐릭터를 스크린으로 다시 보면서 정우 역시 혀를 내둘렀다고 했다.
“정말 카리스마 있고, 아주 파격적인 캐릭터로 나오더라고요. 물론 촬영 현장에서 최무성 선배님의 모습도 그랬지만 스크린으로 보는 용강의 모습은 더 신선하고 에너지가 풍부하게 느껴졌어요. 그건 분명히 선배님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실제로는 되게 따뜻하신 분이에요. 그렇다고 유머가 있거나 말씀이 많으신 편은 아닌데요(웃음). 따뜻하고 정말 자상하신 분이죠.”
시대극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배우라는 세간의 평대로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뜨거운 피’ 역시 정우라는 배우의 매력을 한층 더 끌어올리고 있다. 영화계에 그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던 영화 ‘바람’(2009)도, 대중들에게 ‘쓰레기 신드롬’을 일으켰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4’(2013)도 모두 1990년대가 배경이었다. 멀지 않은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인상(?) 탓일까.
“제가 1990년대가 주는 분위기와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친근함이나 털털함, 내추럴한 이런 모습이 그 시대적 배경과 잘 맞는다고. 그런데 저도 사실 궁금하긴 해요. 왜 자꾸 저한테 1990년대 (작품을) 주시지?(웃음) 아마 ‘응답하라 1994’의 영향이 커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저야 감사하죠. 저 역시 연기하면서 재미있거든요. 제가 향수를 느낄 법한 그런 시대의 작품이다 보니 저도 반갑기도 하고 낯설지 않다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요.”
그런 정우는 ‘뜨거운 피’ 외에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모범가족’, tvN 드라마 ‘멘탈코치 제갈길’의 공개를 앞두고 있다. ‘멘탈코치 제갈길’에선 그의 장기인 코믹 일상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한편, ‘모범가족’에선 범죄 스릴러 장르로 이전보다 더 독해진 새로운 캐릭터로서의 정우를 맞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상반되는 캐릭터를 번갈아 연기하는 것이 즐겁다는 정우는 데뷔 21년 차를 지나고 있는 지금도 차기작을 이야기할 땐 늘 신인 배우처럼 눈을 빛냈다.
“저는 작품을 볼 때 밝은 부분을 6, 진지한 부분을 4로 잡고 선택하게 되는 것 같아요. 긴장과 이완, 진지함과 유쾌함을 오갈 수 있는 그런 캐릭터들이 참 매력적으로 다가오거든요. 정우라는 배우를 다양하게 보여드릴 수 있으니까요. 사람이 너무 진지하기만 하면 재미없지 않아요?(웃음) 어떤 분들은 제가 유쾌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고 생각하시고, 또 다른 분들은 거친 느낌을 많이 보여준다고 생각하시더라고요. 그런 말씀을 듣고 있으면 배우로서 내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