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2개월 만에 억대 시드투자 유치…불투명한 국내 수목 유통 과정 혁신이 목표
#평생을 자연에 푹 빠져 살아온 ‘안정록 대표’
1991년생인 안정록 대표의 고향은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가야리다. 그는 집 앞 포도밭과 드넓은 들판에 발을 디디며 할머니와 시래기를 주우러 다녔고, 부드러운 산세의 품 안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중 두루미 월동은 소년의 삶을 송두리째 흔든 사건이었다. 그 광경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것을 지키고자 생태학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2009년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유니세프(UNICEF)가 주관하는 청소년 세계기후변화포럼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당시 전 세계 50개국 200명 학생이 모였고, 환경 활동에 참여한 계기는 가지각색이었다. 특히 소년의 계기는 남달랐다.
안정록 루트릭스 대표는 “선진국 학생들은 보통 ‘다큐멘터리를 보고서 환경 활동을 시작했다’고 인터뷰했고, 후진국에서 온 학생들은 ‘해수면 상승으로 섬 소멸 위기, 물 부족 등 실질적으로 삶의 영향을 받아서 왔다’고 말했다”며 “당시 전 ‘자연의 아름다움만으로도 보호할 가치가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 많은 대중에게 알려서 그 감동 자체를 전달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진심으로 자연을 위하는 마음이 생겨야 기후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안정록 대표는 고려대학교 환경생태공학과에 진학한 후 과 회장을 맡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조경학 수업을 듣고서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고대에는 조경학과가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안 대표는 고등학생 때 생태연구동아리를 만든 것처럼 교내에 생태탐사동아리 조경연구회를 직접 만들어 초대 회장을 지냈다. 학부를 마치고 조경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2016년 8월 하버드대학교 건축대학원 조경설계학과에 입학했다. 국내의 열악한 체계를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재 수목 정책과 집행에 있어 국토교통부,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안전부, 농림축산식품부, 산림청, 환경부 등에 권한과 책임이 분산돼 있다. 부처 ‘밥그릇 싸움’이 때문이라는 것이 관련 업계 중론이다.
이와 관련, 안정록 대표는 “한국은 나무에 대한 데이터가 전혀 없다. 공부하면서도 나무에 대한 세부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는 것을 봤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특히 한국은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한 기술을 제대로 보급하거나 연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설립 2개월 만에 억대 시드투자 유치
수목 유통 스타트업 루트릭스 창립은 예상치 못한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대유행)이 계기가 됐다. 안정록 대표는 군대에서 전역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수업은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그러다 우연히 조경연구회 회장을 역임한 과 후배와 술자리를 갖게 됐다. 서로 처음 본 사이지만, 나무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털어놓으면서 공통의 관심사를 발견했다. 그렇게 ‘깐부’를 맺게 됐다. 이후 둘은 컴퓨테이션 디자인 설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합을 맞췄고, 수목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과 아이디어를 함께 구상했다. 그 후배가 바로 김유겸 루트릭스 최고기술책임자(CTO)다.
문제는 둘 다 스타트업 창업이나 경영에 문외한이던 공대생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고민만 늘어가던 중 생활비가 떨어졌고, 이를 충당하고자 안정록 대표는 유학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일을 그만두기 전 우연히 마주쳤던 선생님과 점심을 먹었고, 자신의 사업 아이템을 털어놓으며 고민 상담을 했다. 뜻하지 않은 인연은 여기서 또 시작됐다. 그 선생님은 서울대 졸업 후 (주)클래식온 운영전략가로서 초기 투자 유치를 진행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그가 바로 정유단 루트릭스 최고운영책임자(COO)다. 이렇게 3명의 공동 창립자가 모이게 됐다.
지난해 8월 창업가 콘텐츠 제작 미디어 이오스튜디오(eo)는 스타트업 서바이벌 프로그램 ‘유니콘하우스 시즌1’ 서류를 받기 시작했다. 루트릭스 창립자 3명은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한 첫 발을 유니콘하우스 참가로 정했다. 안정록 대표와 김유겸 CTO는 그간 함께 고민해온 시장의 문제점, 해결점과 비즈니스모델 구축 방안 등을 정리했고, 정유단 COO는 액셀러레이터의 시점에서 사업계획서를 정리했다. 당시 서류 접수에 총 400여 팀이 참가했고, 이 중 루트릭스는 본선 진출 12개 팀에 포함되는 데 성공했다. 액셀러레이터로 류중희 퓨처플레이 대표, 박지웅 패스트트랙아시아 대표, 최경희 소풍벤처스 파트너, 신재식 네스트컴퍼니 대표 등이 참석했다.
본선 진출 덕분에 지난해 11월 1일 루트릭스는 법인을 공식적으로 설립했다. 유니콘하우스 파이널 라운드에 오르지 못했지만. 지난 1월 1일 퓨처플레이·소풍벤처스로부터 억대의 투자를 받았다. 창립 2개월 만에 받은 시드투자인 점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규모다. 특히 스타트업 신에서 퓨처플레이는 대기업 수준의 액셀러레이터로 꼽힌다. 그만큼 루트릭스 사업 성공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셈이다.
안정록 대표는 “류중희 퓨처플레이 대표는 엄청 무섭고 비판적인 분이다. 그런 분이 내게 제일 먼저 달려와서 ‘같이 가죠’ 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유니콘하우스 액셀러레이터 네 분 모두 스타트업 신에서 오랜 시간 많은 회사를 평가해왔다. 그런데 네 분 모두 기술을 활용해 조경 시장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나선 건 루트릭스가 처음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류 대표와 최경희 파트너가 서로 루트릭스에 투자하겠다고 싸웠던 것도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루트릭스는 수목 유통의 폐쇄적인 품질 정보와 유통 과정의 비효율 해결에 나설 계획이다. 국내 수목 시장은 6조 5000억 원에 이르지만, 명확히 구축된 수목 데이터가 없어 수기로 작성된 규격표와 보증되지 않은 품질표를 통한 거래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판로를 확보하지 못한 농가는 수목의 최적 판매시기를 놓쳐 수익성 악화와 조경수 가치 폭락으로 인한 경제적 고충을 겪는다. 소비자가 겪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유통 경로의 비효율과 수목 생육 정보 부재로 인해 경기도 북부에서는 조경 수목 하자율이 30~40%에 이른다. 정보의 비대칭으로 인해 유통업자의 힘이 막강해져 중개 수수료도 높게 형성됐다. 거래 참여자들은 경제적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지만, 현재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 중개 수수료는 수목 가격의 30~70%에 달한다.
안정록 대표는 “수목 시장 조사를 위해 공급업자들을 찾아가도 유통업자 눈치를 보느라 인터뷰를 해주지 않았다. 판로를 꽉 잡고 있는 유통업자가 나무를 안 팔아주면 경제적 불이익을 보기 때문”이라며 “수목 시장은 대부분 현금 거래라 유통 과정이 불투명하다. 유통업자들은 노지를 정리해준다며 나무를 공짜로 가져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루트릭스는 국내 최초로 수목 거래 플랫폼을 통해 시장 내 투명하고 정확한 수목 정보를 구축하고, 참여하기 쉬운 수목 거래의 장을 만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이를 위해 수목 생장 예측 모델과 수형 분류 모델 등의 소프트웨어(SaaS) 개발에 착수했다. 수목 데이터 수집은 ‘라이다 스캐닝’, 유통망관리(SCM)는 지리정보시스템(GIS) 기술을 적용한다. 현재 드론 라이다와 백팩 라이다를 이용한 수목 정보생성, 환경데이터와 수목 정보 딥러닝, 라이다 및 초분광 카메라 활용 활력도 분석, UAV 영상과 SfM 기술 활용 탄소저장량 추정 등 4건의 특허 출원을 진행 중이다. BIM 연구소(림인포테크)와 협업 중이며, 고려대 환경생태공학부와 서울대 환경대학원으로부터 자문을 구하고 있다. 산림청, 환경부, 강원혁신센터와의 협업도 준비 중이다.
안정록 대표는 “실례로 1년에 한 번 사람 2명을 써서 일주일 동안 5000그루만 조사하는 전업 농가들이 많다. 그해 팔릴 나무만 조사하는 셈”이라며 “수기로 부지에 있는 나무를 전체 조사하는 건 불가능하다. 농가에서는 이런 불편함을 모두 인지하고 있다. 벌써 23곳의 대형농원이 MOU를 맺은 것도 이런 불편함에 공감하고 있는 덕분”이라고 말했다.
루트릭스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신사업으로도 외연을 확대할 계획이다. 개별 수목에 대한 데이터를 확보해 탄소흡수량을 측정하고, 환경적 영향평가와 경제적 환산을 가능케 하는 것이 골자다. 정부뿐만 아니라, 글로벌 기업들도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탄소) 배출량을 감축하지 못하면 탄소배출권을 구매해야 한다. 2016년 1톤(t)당 연평균 1만 7056원이었던 탄소배출권 가격은 2020년 2만 9604원으로 상승했다. 탄소배출권 거래제는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유럽·미국·중국 등지가 도입해 시행 중이고, 한국도 2015년 거래제를 도입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도 2030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와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공약에 국토의 60%를 차지하는 산림을 활용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서는 수목 데이터를 확보해 도심지역의 탄소를 얼마나 흡수하는지, 산림의 환경 영향에 대한 경제적 환산이 필요하다. 문제는 현재 수목 개체에 대한 데이터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안정록 대표는 “뉴욕 맨해튼은 가로수까지 데이터 맵핑(Mapping)을 했다. 가로수가 어떻게 성장하며 탄소흡수를 얼마나 하고 있는지 계산해서 시민들에게 공유하고 있지만, 한국은 이런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는다”면서도 “실제 데이터들은 많다. 하지만 정부는 업무량 증가, 문제 발생 위험, 데이터 효용성 등을 이유로 공개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