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국경폐쇄 후 1만 7000명 표류, 임금 절반 이상 북한 당국 몫…중국 ‘대북제재’ 의도적 위반 의혹도
중국 지린성 옌볜 조선족자치구 소속 도시 중 하나인 훈춘은 오묘한 지정학적 특징을 가진 지역이다. 굽이굽이 흐르는 두만강을 맞대고 동쪽으론 러시아, 남쪽으론 북한과 접경해 있다.
먼저 훈춘이 남쪽으로 국경을 맞댄 북한은 2016년부터 연이은 핵실험으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대상이다. 동쪽으로 국경을 맞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2022년부터 국제사회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훈춘을 중심으로 중국과 국경을 마주한 국가들이 연이어 국제사회에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는 형국이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현재 훈춘에는 약 1만 7000명 규모 북한 노동자가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북한 노동자들은 2020년 코로나19로 인한 북한 국경폐쇄 당시 훈춘에 남아 있다가 발이 묶인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소식통은 “현재 훈춘에 체류하고 있는 북한 노동자들은 전자, 복장(섬유 및 의류), 수산물 이렇게 세 종류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은 “수산물 공장은 러시아에서 들여오는 명태나 연어 같은 수산물을 취급하는 가공 공장이다. 전자 공장은 전자기기 부속품을 생산하며, 복장 공장은 말 그대로 의류나 섬유를 취급하는 공장”이라고 설명했다. 분야와 기술 숙련도를 막론하고 북한 노동자를 고용하는 비용은 균일가로 적용된다고 한다. “북한 노동자 1인당 한 달 임금은 2300위안(약 44만 원)”이라면서 소식통은 이렇게 부연했다.
“북한 노동자들은 공장 안에 마련된 숙소에서 잠을 잔다. 휴일에도 나와서 돌아다니는 것은 제한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공장 사장, 부사장이 북한 노동자들을 관리하고 북한 보위부에서 파견된 지도원들도 따로 있다. 북한 보위부가 파견한 인력들도 중국 현지 공장에서 월급을 수령하고 있다. 일반 노동자가 외출을 하려면 영도(관리자)와 함께 나와야 한다.”
훈춘에서 근무하는 북한 노동자들이 받는 월급이 모두 노동자 지갑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중국 소식통은 “북한 노동자들이 훈춘에서 일하면서 받는‘실수령액’은 2300위안 중 1000위안(약 19만 2000 원) 정도”라면서 “1300위안(약 25만 원)은 북한 당국에서 가져간다”고 했다.
그는 “북한 당국이 가져가는 1300위안 중 300위안은 노동자들 식사를 제공하는 데 활용된다. 1000위안을 국가에서 떼어가는 셈”이라면서 “식비 300위안(약 5만 7000 원)을 제외하면 2000위안(약 38만 5000원)을 국가와 노동자가 반으로 나누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전했다.
북한 노동자들이 훈춘에서 일할 때 고려해야 할 지령이 하나 있다. 바로 ‘조선 글(한글)을 쓰는 데에선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과거 훈춘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국 기업 공장에선 북한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이런 지령이 떨어진 뒤로는 한국 기업 공장은 중국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훈춘 현지 북한 노동자들 연차는 3~7년 차 사이가 대부분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대유행) 이후 사실상 반강제로 훈춘에서 붙박이 근무하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엔 결혼 적령기를 한참 넘겼는데, 북한으로 귀환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게 중국 소식통의 전언이다.
중국 소식통은 “북한 여성들은 통상 스물다섯 정도를 결혼 적령기로 보는데, 스물셋이나 스물넷 즈음에 왔다가 벌써 서른을 훌쩍 넘긴 여성 노동자들이 있다”면서 “결혼을 하러 북한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국경이 폐쇄돼 반강제로 훈춘에 남아 공장 업무를 이어가고 있는 노동자도 적지 않다”고 했다.
한 대북 소식통은 “북한에서는 여자가 서른이 넘으면 결혼을 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면서 “설사 결혼을 하더라도 좋은 배우자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다”고 했다. 소식통은 “빨리 북한으로 돌아가서 결혼해야지 생각하는 여성 노동자 비율이 작지 않은데, 북한 당국이 국경을 폐쇄한 탓에 이들은 별 다른 선택권 없이 훈춘에서 일을 계속 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 했다.
그는 “여기 있는 북한 노동자들의 경우 국경지대보다 강원도 같은 내륙에서 온 비율이 더 많다”면서 “훈춘에서 일하면서 북한에서 집 한 채를 사고도 남을 만한 목돈을 모았는데 귀국을 못해 북한 노동자들의 걱정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훈춘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이 발이 묶여 근로를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중국 당국이 대북제재를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7년 9월 유엔 안보리는 결의 2375호를 통해 대북제재를 강화한 바 있다. 유엔 안보리 결의 2375엔 해외 북한 노동자 신규 허가 금지 조항이 추가됐다. 기존 해외 북한 노동자는 근로 허가 기한이 만료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중국 소식통은 “훈춘 현지 공장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의 경우 이런 대북제재 결의안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일을 계속하고 있다”면서 “노동자 관리 자체를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하기 때문에 노동자 개인별 근무 이력 및 연차를 파악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소식통은 “압록강 지역 접경지대인 단둥 같은 경우엔 보는 눈이 많기 때문에 대북제재 관련 사항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있으나, 훈춘 같은 ‘사각지대’에선 대북제재는 그저 허울에 지나지 않다”면서 “훈춘은 길림성이나 옌볜조선족자치구 중심과도 거리가 있어 대북제재 여파가 미치기 쉽지 않은 특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훈춘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훈춘 도심 인구는 20만 명 정도”라면서 “20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에 북한 노동자 1만 7000명이 들어와 있다는 것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것”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조그만 동네에 북한 노동자 인구가 이 정도라는 것은 훈춘에서 이뤄지는 산업 전반에 걸쳐 북한 노동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말도 된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훈춘 강 건너편에 있는 러시아에서 일하는 북한 벌목공들도 새로운 비자를 발급받지 못해 일이 끊겼다”면서 “훈춘에서 이 정도 규모 북한 노동자가 그대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중국이 의도적으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를 위반하는 것 아니냐 하는 부분을 짚어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훈춘 현지 사정에 밝은 또 다른 소식통은 “북한 노동자들이 월급 중 반을 나라에 헌납하고 본인은 1인당 1000위안을 가져가는 상황은 대북제재 결의안을 위반한 것”이라면서 “대북제재가 본격화되기 전, 단둥에서 북한 노동자 4000명을 받아달라는 북한 측 요청에 허가가 나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훈춘에서 1만 7000명 규모 북한 노동자가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것”이라고 했다.
소식통은 “북한이 국경 폐쇄로 북한 노동자들의 귀국길을 막아 놓은 상황에서 중국 측 ‘사각지대’인 훈춘에선 대북제재 관련 감시망이 허술해진 상황”이라면서 “훈춘이 대북제재 사각지대로 남는다면, 북·중·러가 국경을 맞댄 이 지역은 엄청난 규모 물자 이동로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대북제재와 관련한 사각지대에 대해 한국 정부 또한 더 강력하게 견제하고 감시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