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세 입문 3년 만에 한국 챔프 “게임도 복싱도 멘탈 싸움”…식당 알바 뛰며 동양 넘어 세계 무대 목표
4월 30일 KBM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에 오른 ‘질럿’ 곽기성 선수의 말이다. 곽기성은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로 MBC게임 히어로 출신이다. 그는 2010년 프로게이머 생활을 시작했지만 1군 벽을 넘지 못하고 1군과 2군을 전전하다 은퇴를 결정하게 된다. 그렇게 곽기성은 프로게이머로서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마우스를 내려놓고 복싱 글러브를 끼면서 결국 빛을 보게 된다.
2022년 5월 11일 일요신문은 수원 태풍체육관에서 땀 흘리고 있는 곽기성 선수를 만났다. 곽기성은 김광수 복싱사관학교 교장(관장)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다. 김 관장은 1990년대 2명의 3체급 세계 챔피언을 키워내 2년마다 열리는 WBA총회에서 WBA최우수 프로모션컵과 최우수 트레이너벨트를 받은 바 있다. 특히 최우수 프로모션컵 한국인 수상자는 현대프로모션 소속 김광수 관장이 유일하다.
김광수 관장은 “내가 수십 명의 챔피언을 만들었지만 그중에서 피지컬은 곽기성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고 단언했다. 곽기성 선수는 191cm, 79kg이다. 이들은 의기투합해 명맥이 끊긴 세계 챔피언을 목표로 정진하고 있다. 곽기성 선수는 프로 데뷔한 지 불과 약 10개월밖에 되지 않은 데다 1993년생으로 올해 한국 나이 30세다. 비인기 스포츠이자 복싱 불모지로 변한 한국에서 늦깎이 데뷔라는 페널티를 안고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말하는 세계 챔피언 목표에 도전하는 곽기성과 김 관장의 얘기를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프로게이머 생활을 정리한 후 어떻게 보냈나.
“2년 정도 하다 스타크래프트 승부 조작 사건이 나고 게임단이 해체됐다. 끝까지 버티면 다른 구단에도 들어갈 수는 있을 거 같았는데 한계를 느껴 그만두기로 했다. 프로게이머 생활을 하다 보니 체중도 늘고 건강도 안 좋아져 취미로 복싱을 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일을 하며 군대도 전역한 뒤 워킹 홀리데이를 가게 됐다. 호주 도축공장에서 일했는데 돈은 당시 많이 벌었지만 반복적인 걸 하다 보니 재미가 없었다. 새로운 걸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취미였던 복싱에 진지하게 도전하게 된 계기가 있나.
“한국으로 돌아와 전기 설비도 배우고 여러 일을 하면서 복싱에 좀 더 깊게 빠져 생활 체육 복싱대회에 나가게 됐다. 4전 4승 3KO 성적을 거두자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3년 전 스물일곱 나이로 너무 늦었지만 지금 아니면 아예 도전해볼 수조차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복싱을 하던 체육관에서 김광수 관장님을 추천해 만나게 됐다. 2019년 겨울부터 본격적으로 프로 무대를 목표로 운동하게 됐다.”
―프로를 목표로 하면서 어려운 점은 뭐였나.
“복싱이 비인기 운동인 데다 코로나19까지 겹쳐 아무리 힘들게 운동해도 경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실전을 못하고 연습만 계속하다 지쳐서 복싱을 그만두고 지게차 면허를 따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렇게 열심히 훈련했는데 한 경기도 못했다는 게 마음에 남아 복싱으로 돌아왔고 첫 번째 경기를 할 수 있었다.”
―프로 데뷔 첫 경기는 어땠나.
“2021년 6월 27일 프로 데뷔 첫 번째 경기에서 10여 초 만에 다운을 기록했다. 이후 남은 시간 동안 모든 걸 쏟아 부어서 역전을 기록해 판정승으로 이겼다. 두 번째 경기는 러시아 선수와의 경기였다. 그 선수는 파워가 좋고 반칙을 계속했지만 KO로 이겼다. 세 번째는 태껸 선수와의 이벤트 전이었다. 네 번째가 한국 챔피언 결정전이었다. 여기서 이겨서 한국 챔피언이 됐다.”
―다음 경기는 어떤 매치를 준비 중인가.
“경기가 끝나고 4개월 정도는 쉬면서 컨디션을 끌어올릴 계획이다. 일단 관장님과 주변에 도와주시는 분들이 일본, 유럽, 미국 쪽에 경기 제안을 해놨다고 한다. 전 세계 선수 누구든 좋다고 했고 경기가 잡힐지 지켜봐야 한다. 다음 경기는 해외 원정 경기가 됐으면 좋겠는데 성사될지 모르겠다.”
―스타크래프트 유닛 질럿이 별명이다. 이유가 뭔가.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생활할 때 프로토스가 주종족이었다. 프로토스 유닛인 질럿처럼 팔이 길고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스타일이나 스텝 밟는 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질럿처럼 성격이나 피지컬로 봤을 때는 나는 슬러거 스타일인데 복서 겸 파이터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무작정 달려들기보다는 전략적으로 치고 빠지는 ‘발업 질럿’으로 성장하고 싶다. 같은 체육관에서 윤덕노 한국 슈퍼미들급 통합 챔피언과 훈련과 스파링을 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다.”
김광수 관장은 “곽기성은 탈 동양인 피지컬이다. 키 191cm, 79kg에 팔 리치가 196cm다. 내가 지금까지 지도자만 43년에 약 50년 동안 복싱계에 있었지만 처음 보는 피지컬이다. ‘이 정도면 세계무대에서도 해볼 만하다’라는 생각이 들어 도전하게 됐다”면서 “한국에서는 곽기성 피지컬만으로 압도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무대에서는 경기 운영 능력과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 그 부분이 많이 성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프로게이머 생활을 했던 게 도움이 된 것도 있나.
“의외로 큰 도움이 됐다. 마우스와 몸으로 한다는 큰 차이가 있지만 복싱과 게임 모두 멘탈이 매우 중요하다. 상대방에게 위축되면 그게 게임에도 드러난다. 게임도 복싱도 찰나의 망설임에 대세가 기운다. 마음을 잡지 못하면 이길 수가 없다. 이기기 위해 전략이나 전술을 어떻게 구상하고 시합에 들어갈지, 게임 중간에 상대방의 플레이를 보면서 순간순간 대응책을 짜는 방식도 비슷하다. 게임하면서 배운 게 복싱에도 도움이 됐다.”
―섣부르지만 동양 챔피언이 되기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이제 한국 챔피언이 됐는데 너무나 섣부른 말이다. ‘복서에게 경험보다 훌륭한 스승은 없다’, ‘복서는 실전 경기에서 성장한다’는 말이 있다. 아직 프로 무대에서 4전밖에 못했다. 다만 목표로는 올해 2경기 정도 치르고 내년에 동양 챔피언에 도전할 기회가 오면 좋겠다. 동양 챔피언이 되면 세계 챔피언에 도전할 자격이 생긴다. 그럼 꿈의 무대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것이다.”
―한국은 복싱 불모지로 통한다. 파이트머니만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다.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한국 챔피언 결정전 대전료가 100만 원이다. 이걸로는 생활이 불가능하다. 오전에 등산이나 유산소 운동을 하고 오후에 2시간 정도 집중해서 훈련을 한다. 이때 관장님이 집에서 체육관까지 2시간 30분 거리를 와서 가르쳐 주신다. 2시간 가르치기 위해 왕복 5시간을 쓰신다. 감사함을 느낀다. 평일에는 훈련이 끝나고 저녁부터 자정까지 중국 음식점에서 6시간 아르바이트를 한다.”
―최근 카넬로 알바레스 1경기 대전료가 우리 돈 700억 원에 가까웠다. 24시간 집중해도 모자란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전료 수백억 원을 받으며 완벽하게 케어받는 세계적 선수와 대결할 수 있을까.
“카넬로가 처음부터 700억 원을 받으면서 경기한 게 아니다. 나는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처음 관장님을 만났을 때 ‘30계단만 같이 올라가자’고 말했다. 복싱은 대전 상대를 잘 만나 30전 이기면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 1계단 오르고 다음 계단을 만날 때마다 훨씬 가파르고 힘들어지지만 그만큼 성취도 커진다. 처음 한국 챔피언에 도전한다고 했을 때도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내 또래는 10년 전에 복싱 시작했는데 뒤늦게 시작해서 누굴 이길 수 있겠냐고 했다. 한국 챔피언까지는 무난하게 달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열 달 만에 한국 챔피언이 됐다. 앞으로도 하나씩 증명하고 싶다.”
김광수 관장은 곽기성이 뒤늦게 시작했지만 그래서 좋은 점도 있다고 말한다. 김 관장은 “레전드 선수인 조지 포먼이 20대에 세계 챔피언이 됐고 은퇴 후 복귀해 45세에 다시 챔피언에 올랐다. 그런데 포먼에게 팔팔할 때 포먼과 40세가 넘은 포먼하고 대결하면 누가 이기냐고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40세 넘은 조지 포먼이 이긴다’고 대답했다. 곽기성과 내가 고등학교 때 만났다면 몇 년 지나면서 잡념이 생기거나 딴 길로 샐 수 있다. 오히려 지금 이 길밖에 없을 때 만나서 더 크게 성장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한국이 복싱 불모지라 아쉬운 점은 없나.
“위기가 기회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만약 내가 정말 목표한 바를 이룬다면 이 분야에서 영웅이 될 수 있다. 스포트라이트를 집중해서 받을 수 있다. 피겨의 김연아, 수영의 박태환처럼 복싱의 곽기성이 될 수 있다. 나쁜 면이 아니라 그런 가능성을 집중해서 보고 싶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