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죄 자백과 번복을 반복하더니 1심 무죄, 밀고한 제보자와 사이좋게 편지 교환…목적은 돈과 재심?
#영구 미제로 남은 명일동 살인 사건…미아동 살인미수는 18년 만에 1심 무죄
이병주는 연쇄 살인범이다. 그는 2004년 10월 공범과 함께 필로폰을 투약한 상태에서 서울 송파구 방이동의 한 빌라에 가스검침원을 가장하여 들어가 주부 등 2명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재물을 강취했다. 그해 12월에는 송파구 석촌동의 한 전당포 건물에 침입해 주인 및 인근 비디오가게 점원 등 2명을 살해했다. 짧은 도주 생활 끝에 체포된 두 사람은 두 사건에서 각각 무기징역을 받아 쌍무기수가 됐다.
사실 수사기관은 2012년부터 이 씨를 2004년의 명일동 살인사건과 살인미수에 그친 미아동 칼부림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이 씨의 공범이 2011년 7월 9일 간암으로 옥중 사망하기 전 자신의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을 불러 여죄를 털어놓은 까닭이다(관련기사 죽음 앞두고 양심고백 ‘석촌동 살인사건’ 범인들의 범죄일지).
문제는 수사기관을 조롱하듯 자백과 번복을 되풀이했다는 것이다. 공범 사망 이후 경찰의 끈질긴 설득 끝에 이 씨는 2012년 범죄 혐의를 인정했다가 다시 자신의 짓이 아니라고 번복한다. 피의자의 자백 외에 폐쇄회로(CC)TV 영상이나 DNA와 같은 물적 증거가 없었던 수사기관은 달리 방도가 없었다.
사건을 맡았던 대구지방검찰청 의성지청은 2015년 9월 명일동 사건을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했다. 그러자 이 씨는 기다렸다는 듯 또 다시 경찰에 자백을 한다. 의성지청이 재수사를 벌이자 이 씨는 ‘하지 않았다’며 또 말을 바꾼다. 경찰과의 심리전을 즐기는 이 씨의 태도를 모티브로 영화 ‘암수살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제껏 잘못했던 것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전하면 조금 빠르게 제가 죗값을 치를 수 있을까.’
2018년 초 한동안 잠잠했던 이 씨의 편지가 다시 경찰서에 도착하기 시작한다. 석촌동 연쇄 살인 사건을 수사했던 한 수사관이 ‘이 씨가 명일동 살인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 씨를 찾아가면서부터다. 당시 이 씨는 순순히 범행을 인정했다고 한다. 경찰은 구체적인 제보 내용을 토대로 새로운 진술과 증거를 확보했고 검찰은 2019년 8월 14일 이 씨를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했다. 미아동 사건 공소시효 만료 닷새를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나 사건은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2020년 7월 검찰은 명일동 사건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린다. 이 씨가 갑자기 입장을 바꿔 두 사건 모두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고 번복한 까닭이다. 살인미수 혐의를 받았던 미아동 사건의 경우 피해자 진술이 있어 기소가 가능했으나 살인 혐의가 적용된 명일동 사건의 경우 이 씨의 자백 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다. 결국 명일동 사건은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됐다.
뒤이어 올해 1월에도 예상치 못한 소식이 전해졌다. 미아동 사건이 발생한 지 18년 만에 열린 1심 재판에서 이 씨가 무죄를 선고 받은 것이다. 유죄의 증거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씨의 자백은 구체적이었으나 그동안의 행적들로 볼 때 이 씨의 자백에는 신빙성이 없었다. 반면,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은 이 씨의 범행을 증명하기 부족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이 씨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목격자들의 진술과 일부 부합한다는 점만으로 자백 진술에 허위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제보자에게 사실조회서 써 준 범인…제보자는 과거 다수의 사기 전력
진실은 무엇일까. 2년 전, 일요신문은 자신이 2018년 당시 경찰에 이 씨 관련 첩보를 제공한 ‘최초 제보자’라고 주장하는 이의 편지를 받은 바 있다. A 씨는 “2017년쯤 같은 구치소에 있던 수감자의 소개로 이 씨를 알게 돼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씨가 자신에게 편지로 여죄를 털어놨고 이를 평소 알고 지내던 경찰에 제보했다”고 했다. 이 씨의 범죄 사실이 적나라하게 적혀있는 증거목록도 첨부되어 있었다.
A 씨는 제보자인 자신은 감형 받지 못 했는데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만 특진한 것이 억울하다고 여러 차례 피력했다. 미제로 남을 뻔한 사건을 수면 위로 올린 공을 알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경찰에 이 씨 관련 제보를 했음을 입증할 수 있는 각종 문서도 동봉했다.
흥미로운 점은 A 씨가 최초 제보자임을 입증해준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씨라는 점이다. 이 씨는 A 씨가 선임한 변호인을 통해 “내 사건과 관련해 A 씨 외에 제보자는 없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의 사실조회서를 써주기도 했다. 즉, 이 씨 본인은 기소돼 재판을 앞둔 와중에 자신을 신고한 A 씨의 감형을 위해 법적 효력이 있는 문서를 써주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이 씨가 미아동 사건으로 기소된 이후에도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이 씨가 A 씨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보면 매우 정중하고 호의적이었다. 자신을 밀고한 상대방에게 보이기 어려운 태도였다.
취재 결과 A 씨는 마약 매매, 투약, 수수 등으로 여러 차례 실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변호사법 위반과 다수의 사기 전력이 있었다. 주목할 부분은 A 씨가 형량 거래를 위한 사기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점이다. 그는 형량이나 수사 공적을 거래 대상으로 삼는 데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2012년에는 사기죄로 재판 중이던 다른 수감자에게 “교정청 심사위원,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청주지검 검사를 알고 있다”며 “감형시켜주겠다”고 제안하고 돈을 요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돈을 받더라도 형사사건을 청탁할 능력이나 의사가 없었다. 한편, 그는 이때도 편지로 다른 수감자들과 연락을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반복되는 자백과 번복의 속내는? “무기수 입장에선 손해 없어”
이렇다 보니 이 씨를 포함한 사건 관련자들의 목적은 처음부터 돈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명일동과 미아동 사건을 돈벌이로 이용하려는 시도가 2012년부터 있었던 까닭이다. 실제로 이 씨 주변의 일부 재소자들은 그의 공범이 여죄를 밝히고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뒤 ‘이것을 공적으로 활용하면 돈이 된다. 2억 원은 받을 수 있다. 이 씨에게는 5000만 원만 주고 나머지는 우리가 쓰자’고 하거나 ‘이 씨의 미제사건을 묵히기 아까우니까 나중에 공적으로 활용하는 등으로 돈을 벌자’고 말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다른 이 씨의 수감 동료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인터뷰에서 “이 씨가 매일 사건을 연구하고 전국의 경찰서와 언론사에 편지를 쓰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으며 영치금을 위해 공적 거래를 해줄 브로커를 찾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한 형사 전문 변호사는 이 씨의 궁극적 목적이 따로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두 번이나 무기징역을 받은 쌍무기수인 이 씨 입장에서는 손해를 볼 것이 없다. 이번 사건으로 유죄를 받는다 해도 어차피 무기수이니 실질적 형량 추가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반면 일이 잘 풀리면 교도소 내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영치금을 벌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면서도 “1차 목적은 돈일 수 있지만 이 씨의 궁극적 목적은 본인이 저지른 살인 사건을 뒤집는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증거가 없는 사건에 대해서만 자백과 번복을 반복해 판을 흔든다. 증거가 없으니 무죄가 나올 것이고 이런 일을 반복하다가 종국에는 ‘무기징역 받은 사건도 내가 한 것 아니다’까지 가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이 씨는 재판 과정에서 명일동과 미아동 사건은 물론 자신이 무기징역을 받은 방이동 사건까지 모두 조작된 것이며 이번 자백은 방이동 사건의 재심을 청구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허위로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