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찌’ 반지 없나요?” 예비부부 똑똑
▲ 10월 초 서울시 단속에 적발된 종로 귀금속 상가의 ‘짝퉁’ 제품과 조사 확인서. 사진제공=서울시 경제진흥본부 |
다가올 12월 결혼을 앞두고 있는 예비신부 이 아무개 씨(29)는 날씨가 추워지기 전 예물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먼저 결혼한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하는 등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결혼식을 준비 중이다. 하지만 예물만 생각하면 머리부터 아파온단다.
이 씨는 “처음엔 시어머니와 함께 예물 준비를 하러 백화점 명품관을 갔다. 티파니, 까르띠에, 불가리 등 마음에 드는 제품이 꽤 많았지만 가격을 듣고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했던 예산으로는 명품관에서 반지 하나 사는 것도 어려울 지경”이라고 말했다.
고민 끝에 그는 ‘명품 카피제품’을 구입하기로 했다. 이 씨는 “이미 명품을 봐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명품 카피제품으로 예물을 한 사람들도 꽤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됐다”고 덧붙였다.
오는 11월 아들 결혼식을 준비 중인 김 아무개 씨(여ㆍ51)는 “예비 며느리에게 가방은 명품으로 사주고 귀금속은 카피제품으로 맞췄다. 백화점에 가니 반지 하나에 300만~400만 원은 기본이어서 솔직히 고민이 많이 됐다. 그런데 예비 며느리가 먼저 카피제품으로 해도 좋다고 말해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가방은 결혼 후에도 활용도가 높지만 귀금속은 평소에 착용하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이게 더 효율적이긴 하다. 대신 남는 돈은 전세비용에 보태 애들의 부담을 줄여주려 한다”고 보탰다.
이들의 사연을 듣고 기자가 직접 ‘예물의 메카’로 불리는 서울 종로 귀금속 상가를 찾아가 봤다. 1000여 점포가 밀집해 있는 지역인 만큼 다양한 제품들이 진열대를 채우고 있었다. 그 중 ‘예물전문’이라는 광고판을 걸어놓은 한 점포를 방문했다. 기자가 “결혼예물을 찾는다”는 말을 하자마자 점포 주인은 진열대 속에 들어있던 10여 가지의 반지를 꺼내 쭉 늘어놓았다. 처음 꺼내놓았던 반지들 속에는 명품은커녕 유사한 제품도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치와 함께 “백화점에서 보고 왔던 것들이 더 예쁘다”고 말하자 곧바로 주인의 손길이 바빠졌다. 이내 진열대에선 볼 수 없던 상품들이 나왔다. 매장 한 구석에서 꺼낸 검은색 상자 안에는 티파니, 까르띠에, 불가리 등 명품반지와 똑같은 모습을 한 반지들이 줄지어 있었다.
한눈에 봐서는 명품반지와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관심을 보이자 주인은 “명품 반지 하나를 살 수 있는 가격에 똑같은 모양으로 반지, 귀걸이, 목걸이, 커플링까지 풀세트로 마련할 수 있다”며 구입을 적극적으로 권했다. “결혼예물을 ‘짝퉁’으로 구매하는 게 꺼림칙하다”고 말하자 주인은 손사래를 쳤다. “요즘은 금값도 비싸고 경기도 좋지 않아 예물도 카피제품으로 많이 한다. 손님들 중에는 다이아몬드 대신 큐빅(시그니티)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다른 제품은 더 없느냐는 물음에는 “혹시 점찍어 놓은 명품이 있으면 이미지를 가져오거나 제품명을 알려주면 주문제작도 가능하다. 최고급 다이아 5부를 사용해 티파니 제품과 똑같이 반지, 귀걸이, 목걸이 세트를 해도 200만 원 안팎이면 구매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주인이 언급한 ‘티파니 루시다 PT950’ 반지는 중고라도 500만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는 제품이다.
기자가 찾은 다른 점포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명품을 찾는다는 의사만 보이면 점포 한 구석에 숨겨준 제품들이 연이어 나왔다. “원하는 브랜드가 있으면 알려 달라”는 곳도 있었다. 이처럼 명품 카피제품을 찾는 예비 신혼부부들이 증가하면서 귀금속 점포 주인들도 바빠졌다.
7년째 귀금속 점포에서 일한다는 한 종업원은 치열한 ‘짝퉁 명품예물’ 눈치싸움에 대해 털어놨다. 그는 “손님들이 눈이 날로 높아져 판매하는 사람들도 공부를 해야 한다. 명품 브랜드별 신상품부터 인기제품까지 꿰뚫고 있는 것은 기본이다. 주기적으로 명품매장을 방문해 트렌드를 살펴본다”고 말했다. 그는 “시중에 깔린 제품이 아니지만 눈에 띄는 것이 있을 경우 구매하는 경우도 있다. 그 제품을 이용해 카피를 하고 진품은 되파는 식으로 가게별로 ‘히든카드’를 마련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종로귀금속 상가 매장을 찾았을 때 진열상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자리를 뜨려하자 주인들이 “내놓지 않은 상품도 많다”며 붙잡았다. 이들이 말하는 ‘내놓지 않은 상품’은 곧 그 가게의 ‘히든카드’를 말하며 대부분이 명품 카피제품이었다.
이 같은 ‘명품 카피’는 엄연한 불법이다. “사치가 아닌 예물비용을 줄이기 위한 방법일 뿐”이라는 한 예비 신부의 변명에도 불법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정부도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있는 상태다. 서울시는 민관 합동 단속반을 편성, 지난 10월 6~7일 양일간 종로 귀금속 점포 1200여 곳을 대대적으로 단속했다. 귀금속 상가가 밀접해 있는 종로 일대가 집중 단속 대상이 됐으며 첫 단속에서 70개 점포가 적발됐다.
적발된 점포에서는 명품 위조 제품 163점과 136건의 상표 도용 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서울시는 이번 단속에서 적발된 업소에 대해 1차로 시정권고 조치를 실시하고, 1년 이내에 추가 적발되면 고발 조치 등 강력한 행정처분을 내릴 방침이다. 그러나 몇 차례 단속에도 개선되지 않는 듯했다. 기자가 종로 귀금속 상가를 찾았던 날도 단속 직후였다.
서울시 경제진흥본부장 관계자는 “명품 카피제품을 판매할 경우 ‘상표법’은 물론이고 ‘부정경쟁 방지 및 영업 비밀에 관한 법률’을 위반하는 불법행위인 만큼 강력히 단속할 것”이라고 전했다. 다만 그는 “현재 국내법으로는 판매자가 아닌 구매자를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은 끊이지 않을 것 같아 염려스럽다”고 덧붙였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