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층 불길 잡히자 위층 새불
▲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왼쪽),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
지난 10월 말 금호아시아나그룹과 관련해 또 하나의 고소 사건이 발생했다. 박찬구 회장이 대표로 있는 금호석유화학 측이 기옥 전 대표(현 금호건설 대표) 등을 사문서 위조와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소한 것이다.
2008년 당시 금호석유화학 사장이던 기 대표는 대한통운 인수자금을 마련하는 데 보탬이 되기 위해 금호렌터카의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하지만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유상증자 확약서를 발행했으며 이것이 결국 회사에 거액의 손실을 안겼다는 것이 금호석유화학 측 주장이다. 금호석유화학은 당시 재무담당 전무이던 박상배 아시아나IDT 부사장도 함께 고소했다.
기 대표와 박 부사장은 모두 박삼구 회장 쪽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다. 애초에 기 대표는 박찬구 회장의 광주일고 동창으로 형제의 난 이전까지만 해도 ‘절친’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형제의 난 당시 기 대표가 박찬구 회장을 몰아내는 데 힘썼다는 이유로 둘의 사이가 갈라졌다는 것. 금호석유화학 측은 앞서 지난 6월에는 박삼구 회장, 오남수 전 사장 등 금호그룹의 전·현직 임원을 사기 혐의로 고소한 바 있다.
금호석유화학은 또 공정거래위원회에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에 대해 계열 제외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하자 곧바로 공정위를 상대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을 만큼 계열분리를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박찬구 회장이 형인 박삼구 회장과 철저히 선을 긋겠다는 행보들이다.
이처럼 금호그룹의 형제간 갈등은 지금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다만 사건 초기와는 달리 대부분 소송과 고소가 박찬구 회장 쪽에서 제기하고 있는 반면 형인 박삼구 회장 쪽은 대응을 자제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만큼 박찬구 회장 쪽이 훨씬 절실할 수도 있고, 주도권이 바뀌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현재 박찬구 회장이 원하는 것은 계열분리다.
박찬구 회장 쪽의 잇단 고소와 소송 제기가 비자금 수사와 관련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적지 않다. 즉 박찬구 회장이 비자금 조성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박삼구 회장 측 때문이고 박찬구 회장이 이에 반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자금과 미공개 내부정보 이용 의혹에 대해 수사를 받을 당시 “죄 지은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다”라는 박찬구 회장의 발언이 이런 관측에 힘을 실었다. 박찬구 회장에 대한 수사는 계속 진행 중이다.
그러나 금호석유화학 관계자는 “이번 고소는 비자금 수사와 관련 없다”며 “금호RAC(옛 금호렌터카) 청산 과정에서 알아낸 것으로서 그 시점은 지난 9월 20일쯤으로 최근 일”이라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박찬구 회장의 계열분리 드라이브에 의문을 제기한다. 금호아시아나그룹과 금호석유화학의 계열분리는 기정사실화돼 있기 때문이다. 금호아시아나그룹 측도 금호석유화학의 계열분리를 사실상 인정하고 있다.
실제로 두 형제그룹은 운영상에서도 완전히 다른 회사처럼 돼 있다. 채권단의 자율협약에 따라 금호석유화학의 독립경영을 인정받고 있는 것은 물론 내선전화, 회사 그룹웨어 등을 모두 따로 운영하고 있다. 금호석유화학에서 그룹웨어를 통해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직원을 검색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내선전화로 서로 연결할 수도 없다. 다만 금호석유화학이 서울 종로구 신문로 금호아시아나 본관 22층에 몸담고 있어 형식적으로 매어 있을 뿐이다. 그룹은 26층부터 사용하고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 계열사들은 모두 프로젝트파이낸싱(PF, Project Financing) 형태로 사옥에 들어가 있다. 여기에는 금호아시아나그룹 계열사만 참여할 수 있다. 따라서 계열분리가 된다면 금호석유화학은 자연스레 금호아시아나 본관에서 나가야 한다. 금호아시아나그룹 내 적지 않은 직원들 사이에서는 “계열분리 시점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느낌”이라는 말이 오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별거 중’임에도 박찬구 회장 측이 ‘이혼도장’을 찍기 위해 힘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형제간에 감정이 상할 대로 상했다는 게 주변에서 꼽는 첫째 이유다. 두 번째는 지분 관계와 관련 있다.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보면 10월 17일 현재 박삼구 회장이 5.30%, 박 회장의 아들 박세창 금호타이어 전무가 5.15%를 보유하고 있다. 박찬구 회장은 7.74%, 아들 박준경 상무는 8.59%를 갖고 있다. 박찬구 회장 부자의 지분은 합해봐야 16.33%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박찬구 회장이 회장으로 복귀 후 틈날 때마다 2000여 주씩 사들인 결과다. 지분 관계만 보면 박찬구 회장 입장에선 불안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공시에 박삼구 회장은 ‘보고자’로, 대표이사인 박찬구 회장은 ‘특별관계자’로 명시돼 있다.
금호석유화학의 계열분리에 대한 박찬구 회장의 의지는 확고해 보인다. 박찬구 회장은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계열분리에 대한 신념을 공공연하게 밝혀왔다. 최근 금융계에서 박삼구 회장이 그동안 질질 끌어왔던 금호석유화학 지분 매각 문제를 마무리 짓고 금호산업을 살릴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된다면 계열분리는 자연스레 이뤄진다.
이에 대해 금호석유화학이나 금호아시아나그룹 측이나 똑같이 “아직 확인된 바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금호석유화학 측은 내심 반기는 분위기다. 금호석유화학 관계자는 “만약 매각한다면 그 지분을 누가 살 것인지 관건”이라면서도 “어쨌든 지분 정리는 해결되는 셈”이라고 밝혔다.
지난 10월 24일 감사원은 2009년 금호아시아나그룹 구조조정 당시 산업은행이 금호생명을 비싸게 인수해 수천억 원의 손실이 우려된다는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안 그래도 구조조정이 시작되기 전부터 채권단이 금호아시아나그룹을 너무 비호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줄곧 제기돼 왔다. 부실의 책임을 져야 할 오너들의 경영권을 사실상 보장해준 점이 대표적인 예다. 여러 논란 속에서 금호가 형제가 명예를 회복하는 길은 빠른 경영정상화밖에 없는 듯하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