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과정 거치지 않은 날것의 정보일 가능성…국정원 근간 흔들 수 있는 대형사고라는 지적도
6월 10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폭탄발언을 했다. 박 전 원장은 “박정희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국정원이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등 존안자료 ‘X파일’을 만들어서 보관하고 있다”면서 “이를 폐기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전국에 있는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이 움찔할 만한 발언이었다.
박 전 원장 발언에 국정원이 즉각 반응했다. 국정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사실 여부를 떠나 원장 재직 시 알게 된 직무 사항을 공표하는 것은 전직 원장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이라면서 “앞으로 공개활동 과정에서 국정원 관련 사항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는 메시지를 박 전 원장에게 전했다.
그러자 박 전 원장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사과했다. 박 전 원장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내가 몸담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국정원과 국정원 직원들에게 부담이 된다면 앞으로 공개 발언 시 더 유의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정원 문서가 정쟁으로 이용돼선 안 된다는 소신을 얘기한 것으로 평소 여야 의원들이나 기자 간담회에서도 다 얘기했던 내용이다. 국회에서 (자료 폐기를) 논의하다 중단된 것이 아쉽다는 점을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전 원장 발언 이후 일요신문은 전·현직 국정원 및 정보기관 관계자들을 만나 ‘국정원 X파일’ 실체를 추적했다. 이들의 첫 마디는 비슷했다. “그런 게 어디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 A 씨는 X파일과 관련해 생선 이야기를 꺼냈다. A 씨는 “바다에서 물고기를 건져 올리면, 그것은 생선”이라면서 “그것을 전문적인 기술로 잘 다듬어야 먹음직스런 회가 된다”고 했다. 그는 “박지원 전 국정원장이 말한 X파일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다”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X파일이라는 것이 성립되려면 전제조건이 몇 가지 있다. 입수한 정보를 카테고리별로 나누어 정보들에 대한 팩트체크가 면밀하게 이뤄져야 한다. 이게 충족된다면 국정원 X파일이 충분히 사회적인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박 전 원장이 이야기한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들에 대한 정보들은 날것 그대로의 정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냥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소문 및 정보를 ‘정보보고’ 형식으로 수집한 형식일 것으로 보인다.”
A 씨는 “그런데 박 전 원장은 이런 정보를 마치 누군가에게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잘 다듬어진 정보인 것처럼 말했다”면서 “박 전 원장의 정치인적 특성이 잘 드러난 사례”라고 했다. 그는 “마치 갓 잡은 생선을 손질까지 다한 생선회라고 홍보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라고 부연했다.
그렇다면 날것 그대로의 정보는 어디에서 수집된 것일까. 답은 다른 전직 정보당국 관계자 B 씨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B 씨는 “국정원은 통상 망원들을 운용해 전국 각지에 있는 정보들을 흡수한다”면서 “망원들이 보고를 올리는 정보들엔 필터가 없다”고 했다. 그는 “그저 뜬소문일 수도 있고, 확실한 정보일 수도 있다. 비정상적인 정보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그렇다고 이런 정보들을 다듬는 공정 과정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 각계 다양한 정보들을 빠르게 흡수하는 이유는 그 정보들에 대공용의점이 있는 사안을 캐치하기 위해서다. 지금은 국정원 대공수사권이 폐지됐지만, 과거에는 대공 관련 사건은 국정원이 직접 수사했다. 일단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정보를 모아놓고, 누군가에게 대공용의점이 있을 경우에 기존 모아놨던 거친 정보들은 간첩활동을 추적하는 데 데이터베이스 역할을 하게 된다.”
B 씨는 “국정원 수사권이 폐지된 마당에 사회 일선에서 올라오는 각종 정보 수집 과정을 박 전 원장이 X파일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B 씨는 “만약 그런 과정이 X파일에 포함된다면 국정원 및 여타 국가 정보기관은 존재 이유가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그런 과정이 X파일이면, 경찰 정보과에서 수집하는 정보들 역시 X파일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박 전 원장의 ‘X파일 발언’은 정치인으로서 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냉담한 반응이 대다수”라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정보 당국자 C 씨는 박 전 원장 X파일 발언에 대해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했다. C 씨는 “정보기관에서는 현직에 있을 때 습득한 정보를 활용한다든가 누설하는 것은 금기사항”이라면서 “정보기관에서 말단으로 일한 경험이 있어도, 이런 정보를 누설하면 현직자들이 찾아와 경위를 묻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C 씨는 “그런데 전직 국가 정보기관 수장이 이렇게 X파일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이례적인 케이스”라면서 “국정원장의 경우에는 하나의 별개 기관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막대하며 예민한 정보들을 모두 보고받는 위치에 있다. 그런데 전직 국정원장이 X파일을 직접 언급한 것은 국정원의 근간 자체를 흔들 수 있는 대형사고”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무래도 정치를 기반으로 했던 정보기관단체인으로서 우발적으로 선을 넘은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정치권에서 활동하는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 D 씨는 “박 전 원장이 X파일이라는 현란한 단어를 쓰면서 언론에 인터뷰를 한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제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D 씨는 “다시 정치판에 들어와 민주당에 입당해 재기를 노리는 포석이라는 분석이 첫 번째 경우”라면서 “또 다른 경우의 수는 내가 이런 것을 쥐고 있으니 ‘나를 건드리지 말아라’라는 식의 엄포성 발언이라는 추측이 있다”고 했다. D 씨는 박 전 원장 인터뷰에 주목할 만한 포인트를 짚으며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여기에 밑줄을 쳐야 한다. 이 말은 곧 문재인 정부는 X파일을 수집하지 않았다는 걸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엔 모순이 있다. 그 사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도 X파일을 수집했다는 게 된다. 자신이 국정원장으로 몸담았던 문재인 정부 시절의 당위성을 강조하느라 놓친 부분이 될 수 있다. 정치와 정보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려다보니 이런 실수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6월 11일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 윤석열 대통령 X파일 존재 여부에 대해 함구하면서 문재인 정부 이후에는 더 이상 X파일을 축적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박 전 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국내 정보 수집, 정치 개입하지 말라고 하니 서훈 전 국정원장이 국내정보 수집부서를 해편했다”고 발언한 바 있다.
D 씨는 “X파일이라는 키워드는 ‘사찰’이라는 단어 대신 꺼낸 것이라고 본다”면서 “사찰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것은 명예훼손 등 법적 문제 소지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D 씨는 “박 전 원장이 X파일이라는 키워드 자체를 언급하는 것이 모순되는 일일 수 있다”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박 전 원장이 현직 재임 당시 윤석열 대통령을 둘러싼 고발 사주 의혹이 불거졌을 때가 있다. 이 과정에서 박 전 원장이 2021년 8월 11일 조성은 씨와 롯데호텔 38층에서 식사를 한 것이 확인되면서 ‘제보 사주 의혹’이 불거졌다. 최근 박 전 원장이 X파일을 언급한 방식을 이 사례에 대입해보면, ‘박 전 원장이 윤석열 X파일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조성은과 회동했다’는 의혹 제기도 가능하지 않겠느냐. 똑같은 사실을 두고 ‘제보 사주 의혹’과 ‘윤석열 X파일 수집 의혹’ 두 가지 의혹이 제기된다면 어떨까.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다르지 않나. 박 전 원장이 이번 인터뷰에서 X파일이라는 단어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며 꺼냈지만, 이는 정치적으로나 전직 정보기관 수장으로나 적절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6월 14일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더 이상 국정원 X파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TBS라디오 인터뷰에서 박 전 원장은 “(국정원이) 좀 안 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오늘부터 (국정원 X파일 관련 이야기를) 말 안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박 전 원장은 YTN 인터뷰에서 “(국정원) 존안 자료, X파일을 얘기했다가 지금 몰매를 맞고 죽을 지경”이라는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