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지의 4분의 1 러시아군 공격 받아 파괴…해상 운송 막혀 개발도상국 식량 위기 악화 우려
전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애그플레이션(Agflation)에는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후유증, 기후 변화에 따른 폭염과 가뭄, 인도의 밀 수출 금지령 등 여러 요소가 뒤섞여 있다. 이런 와중에 발생한 우크라이나의 곡물 대란은 사실 물가에 기름을 붓는 격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 러시아 침공 전까지 매달 최대 600만 톤이었던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량은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월 170만 톤으로 대폭 감소했다. 이와 관련, 타라스 비소츠키 우크라이나 농식품부 차관은 최근 “6월에도 한 달 곡물 수출량은 200만 톤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55.5%가량 감소한 수치다.
수출량이 감소한 이유는 먼저 전체 농경지의 약 4분의 1이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아 파괴됐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농식품부는 6월 중순 기준으로 “농경지의 25%가 감소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발표했다.
또한 러시아의 흑해 연안 항구 봉쇄로 수출길이 막혔다는 점도 곡물 수출량에 영향을 미쳤다. 해상 수출길이 막힌 경우 육로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데 이럴 경우 시간도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기차와 트럭으로 실어 나를 수 있는 수량도 제한돼 있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점이 문제다.
저장고가 부족한 탓에 그나마 수확한 곡물을 폐기해야 할 처지라는 점도 문제다. 오는 7월이면 보리, 밀 등의 수확기가 본격 시작되지만 정작 수확한 곡물을 저장할 창고는 부족한 상태다. 이는 제때 수출하지 못한 지난해 곡물이 아직 창고에 그대로 쌓여 있어 저장 공간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규모가 큰 농업 기업 가운데 하나인 ‘IMC홀딩’의 사장인 알렉스 리시차(48) 역시 이런 문제에 봉착한 상태다. 우크라이나 북부 체르니히프에 있는 자신의 곡물 창고를 살펴보던 그는 “러시아군은 계속해서 박격포와 그라드 미사일을 쏘아댔다. 이로 인해 창고 곳곳에 구멍이 났으며, 지붕이 여러 군데 무너졌다. 하지만 다행히 창고 안은 곡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무너지지는 않았다”라며 씁쓸해 했다.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격렬한 교전이 계속되고 항구도시 마리우폴이 무너지는 동안에도 리시차 같은 기업가들은 다시 과감하게 재건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지난 봄 내내 키이우의 서쪽과 북쪽의 경작지에서 열심히 밭을 갈아 파종을 했던 리시차는 “예년보다는 조금 늦긴 했지만 올여름에 수확하기에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현재 ‘IMC홀딩’은 체르니히프, 수미, 폴타바 등에서 총 12만 헥타르의 땅을 경작하고 있다. 이 지역들은 모두 비옥한 곡창지대로, 보통 여름에도 특별한 관개 용수 없이도 경작할 수 있는 흑토로 이뤄져 있다. 따라서 전쟁 전까지만 해도 ‘IMC홀딩’은 연간 2억 유로(약 272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성공적인 기업이었다.
리시차는 “우리 회사는 우크라이나 10대 농업 회사 가운데 하나였다”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하지만 이런 자부심이 무색하게 지금은 전쟁으로 모든 게 바뀌고 말았다. 리시차는 “이제 우리는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위기에 빠져 있다”며 침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현재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러시아 해군이 우크라이나 항구를 봉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회사는 지금까지 오데사와 미콜라이우를 통해 밀, 옥수수, 해바라기씨 기름 등 거의 모든 생산물을 해상으로 수출해왔다. 리시차는 “정부는 아마도 내년까지 항구가 폐쇄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가을쯤 파산할지도 모른다”라며 우려했다.
이는 비단 우크라이나 기업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항구 봉쇄가 오래 지속될수록 개발도상국들, 특히 우크라이나 곡물의 주요 수입국들인 북아프리카, 중동, 남아시아의 식량 위기는 더욱 악화될 수 있다.
“현재 러시아와의 전쟁 때문에 우크라이나 남부 및 동부의 많은 지역에서는 농사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다”라고 말한 리시차는 “지난 몇 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경작된 토지는 약 3000만 헥타르였다. 하지만 올해는 2200만 헥타르의 토지만이라도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밝혔다. ‘IMC홀딩’의 경우에는 올 한 해 경작지의 약 20~25%에서 농작물을 수확하지 못하게 될 전망이다.
이는 연료, 비료, 살충제의 부족 때문이기도 하다. 농사 자금이 부족한 탓에 비료의 양을 예년보다 3분의 1로 줄였으며, 1년에 네 번 살포하던 살충제는 이제 두 번만 살포하고 있다. 또한 고장이 난 농기계의 부품은 몇 주를 기다려야 구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리시차는 “전시에도 일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도 다음 주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위험은 예측할 수 없다”고 푸념했다.
전쟁 전에는 항상 3월과 6월 사이에 매달 약 10만 톤의 옥수수를 출하했기 때문에 7월이 되면 창고를 비울 수 있었고, 이로써 수확한 밀을 보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시차는 “올해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며 걱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55만 톤 규모의 여섯 개 창고 가운데 절반은 여전히 지난해 수확한 옥수수로 채워져 있다. 옥수수를 비롯해 현재 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곡물은 총 7000만 유로(약 950억 원) 상당”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그는 “만일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늦어도 10월 전에 파산할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그렇게 될 경우 2000여 명의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고, 곳곳에서 경작지로 임대하고 있는 토지의 임대료도 지불할 수 없게 될 전망이다.
현재 리시차는 수확한 옥수수를 트럭과 기차를 이용해 폴란드와 루마니아로 운반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문제는 엄청난 물량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운송 수단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리시차는 “월 3만 톤씩 운송하려면 일주일에 약 100대의 트럭이 필요하다”고 추정했다.
기차로 운송하는 방법도 문제다. 리시차는 “안타깝게도 기차를 이용해 유럽연합국까지 직접 운송할 수는 없다. 유럽연합국의 선로 폭이 우크라이나의 것보다 좁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그는 궁여지책으로 폴란드 국경 너머에 임시 저장고를 건설할 방안을 찾고 있으며, 동시에 옥수수 구매처를 찾아 헤매고 있다. 리시차는 “톤당 240유로(약 32만 원)에 판매할 의향도 있다”고 밝혔다. 이는 세계 시장 가격인 340유로(약 46만 원)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이다. 리시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고객들은 여전히 흥정하기를 원한다”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오는 7월이면 밀을 수확할 수 있긴 하지만 리시차는 “그리고 나서 6개월 동안은 휴경할 계획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리시차의 회사는 다른 회사에 비해 그나마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다행히 러시아군이 예상 외로 빨리 그 지역에서 철수했기 때문에 늦게나마 농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다른 지역의 경우에는 러시아군에 의해 농기계를 강탈당하거나 경작지가 파괴된 곳도 많았다. 동부와 남동부의 경작지에서는 러시아군이 40만 톤의 곡식을 훔쳐 달아나는 일도 발생했다.
체르니히프의 저장고 관리자인 세르게이 야로쉬는 “러시아군은 마을에서 가장 좋은 집을 점령한 후 주인을 거리로 내쫓았다. 저항하는 주민들은 모두 총에 맞아 숨졌고, 남자들은 고문을 당했다. 폭발과 포격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서늘한 지하실에 숨어 몇 주 동안 감히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며 악몽 같았던 순간을 회상했다.
러시아 국경 근처의 마을에 살고 있는 리시차의 어머니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나르던 중 눈앞에서 러시아 탱크를 목격한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가벼운 뇌졸중을 앓았고, 며칠 동안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다. 리시차는 “러시아군이 무선이동통신 기지국을 파괴하고, 전기를 끊어버렸기 때문에 어머니를 방문하거나 전화 연락을 할 수 없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전쟁이 끝난다 해도 곧바로 농사를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러시아군이 곳곳에 심어놓은 지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단 한 번이라도 러시아군이 점령한 토지에는 절대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리시차는 “우리 회사 역시 지뢰 제거반을 통해 몇 군데 밭을 점검했다”고 말하면서 “그 결과 불발된 박격포 포탄, 그라드 미사일 파편, 두 개의 지뢰를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리시차는 앞으로 밭에 떨어진 포탄들을 제거하는 데만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다.
리시차는 겉으로는 자신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늘 노력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회사가 파산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파산을 막으려면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현재 우크라이나 은행에서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유럽연합국에 손을 벌려야 하는 입장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태다. 60세 미만의 남성들은 공식적으로 출국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정부는 사업가들에게는 일종의 특별 출국 허가증을 발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역을 하는 많은 기업들이 줄도산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장 대출을 받을 수 없다면 절약만이 답이다. 이에 따라 키이우 지점을 임시 폐쇄한 그는 “지점 운영비는 매달 3만 5000유로(약 4700만 원)의 비용이 든다. 그 돈이면 40명의 급여를 지불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어려운 때임을 강조했다.
리시차에게 ‘포기’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IMC를 인수한 후 10년 만에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효율적인 농업지주회사 가운데 하나로 탈바꿈시킨 그는 이제는 러시아의 공격으로 인해 무너진 회사와 나라가 위기를 잘 극복하고 살아남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러시아는 결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호언하면서 “지금은 힘들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강인하다. 우리는 푸틴이 벌이는 파괴적인 전쟁에서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고 장담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