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캐스팅 관여 말아야” 뮤지컬 1세대들까지 참전…옥주현-김호영 고소전에도 눈길
8월 25일부터 열리는 뮤지컬 ‘엘리자벳’의 10주년 공연은 주요 배역 2명의 캐스팅이 논란이 됐다. 주인공이자 극의 상징인 엘리자벳 황후 역의 이지혜와 그의 상대역인 황제 프란츠 요제프 역의 길병민이다. 이지혜는 기존 뮤지컬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 사실상 출연이 기정사실처럼 여겨져 왔던 김소현을 제쳤다는 점에서, 길병민은 이번이 첫 뮤지컬 도전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연기 경험과 나이가 많은 배우들이 맡는 프란츠 황제 역을 맡았다는 점이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캐스팅이 도마 위에 오른 배경엔 옥주현과의 관계성이 있다. 이지혜는 옥주현이 가장 아끼는 후배 가운데 한 명으로 서로를 ‘서울 엄마’와 ‘딸’로 부를 만큼 친밀한 관계로 알려졌다. 옥주현이 주연을 맡은 작품에 조연으로 종종 출연해 왔던 이지혜는 옥주현이 3월 신설해 이사로 있는 연예기획사 ‘타이틀롤’에서 감사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 단순한 선후배 이상의 관계성을 가진 셈이다.
뮤지컬 경력 10년 차로 실력과 경험 면에서 본다면 결코 다른 배우들에 뒤지지 않지만, 이처럼 특수한 관계가 엘리자벳의 캐스팅 논란과 맞물리며 팬들의 의심은 눈덩이처럼 커져가기 시작했다. '엘리자벳'의 공연 이력과 인지도, 그리고 티켓 파워 측면에 따라 더블 캐스팅으로 진행할 경우 옥주현과 더불어 팬들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김소현이 엘리자벳을 맡아야 하지만, 김소현이 배제된 데에 이 같은 인맥이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더욱이 길병민도 옥주현과 같은 소속사였던 데다, JTBC 예능 ‘팬텀싱어3’을 통해 깊은 친분을 가져왔다는 사실이 지적되면서 이 같은 인맥 캐스팅 의혹의 중심에 선 옥주현에게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논란에 기름을 부은 건 뮤지컬 배우 김호영의 이른바 ‘옥장판 저격’이었다. 캐스팅 공개 직후인 6월 14일 그는 자신의 SNS(소셜미디어)에 옥장판 사진과 극장 모양 이미지를 올린 뒤 “아사리판(난장판을 뜻함)은 옛말이다. 지금은 옥장판”이라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남겼다. 종종 업계 관련 이야기를 SNS에 올려온 김호영이 옥주현과 그의 인맥 캐스팅을 지적한 것이란 분석이 나왔고, 이 같은 해석이 언론보도를 타고 확대되자 옥주현은 결국 6월 20일 김호영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김호영 측 역시 옥주현에 대해 맞고소 가능성을 비추며 진흙탕 싸움을 예고하기도 했다.
연예계 경력으로 친다면 옥주현이 선배지만, 뮤지컬계에서는 김호영이 옥주현보다 3년 선배다. 동종 업계, 그것도 후배가 선배를 고소한 초유의 사건에 업계 관계자들도 “이렇게까지 갈 문제가 아니다”라며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양측 조율을 통해 갈등을 해결할 방법이 분명히 있음에도 고소라는 강수를 둔 것이 오히려 옥주현에게 부정적인 반응만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과정에서 신영숙, 정선아 등 유명 뮤지컬 배우들이 옥주현의 인스타그램을 ‘언팔’한 사실이 확인돼, 업계 내에서 옥주현을 향한 여론이 좋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여기에 한국 뮤지컬 1세대들도 가세했다. 6월 22일 뮤지컬 배우 남경주, 최정원과 뮤지컬 음악감독·연출 겸 배우 박칼린은 “모든 뮤지컬인들께 드리는 호소 말씀”이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발표했다. 옥주현의 고소 사건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고 밝힌 이들은 현 사태에 대해 크게 세 가지 문제를 지적했는데 △배우는 연기라는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며 캐스팅 등 제작사 고유 권한을 침범하지 말아야 하며 △스태프는 모든 배우를 평등하게 대해야 하고 △제작사는 함께 일하는 스태프와 배우에게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려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엘리자벳’ 사태에서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가졌던 ‘인맥 캐스팅’이 실재했고, 이 과정에서 제작사인 EMK뮤지컬컴퍼니와 스태프가 특정 배우와 맺었던 구두 약속 등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업계인들이 직접 지적한 셈이다.
이들의 성명문은 많은 뮤지컬계 인사들의 지지를 받았다. 성명문을 공유하기 위해 생애 첫 SNS를 개설해 눈길을 끌었던 차지연부터 김소현, 전수경, 정선아, 신영숙, 정성화, 최유하, 최재림, 박혜나, 손승연, 이건명, 이상현, 임진아 등 일반 대중들에게도 알려진 유명 배우들의 참여가 이어졌다. 이들 대부분은 자신의 SNS에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뻗는 사진을 함께 올렸는데 이 사진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 ‘엘리자벳’의 음악을 맡고 있는 민활란 음악감독 등 뮤지컬 관계자와 아이돌 출신 뮤지컬 배우인 러블리즈 케이, 2AM 조권 등도 응원을 보태면서 사실상 이 사태는 EMK뮤지컬컴퍼니-옥주현과 뮤지컬계의 전면전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실제로 이런 ‘끼워넣기’ 캐스팅 문제는 뮤지컬이나 연극, 드라마, 영화 등에서 일정 부분 관행처럼 여겨지기도 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다만 이런 부분이 명확한 사실로 드러날 경우 제작사 역시 비판의 대상이 돼야 함에도 이번 사태에서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배우인 옥주현만이 대중들의 ‘욕받이’가 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극계 관계자는 “모든 유명 배우가 캐스팅 판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티켓 파워가 강하거나 제작사와 오랜 기간 동안 인연을 맺은 대형 배우는 충분히 그만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서도 “그러나 이런 문제를 단순히 배우 한 명에게만 돌리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제작 환경이 먼저 개선돼야 그런 배우가 나오지 않는다”고 짚었다.
한편으로 이번 사태가 전면전으로 번지게 된 데엔 옥주현의 고소가 가장 큰 역할을 한 만큼 취하 여부에도 관심이 모인다. 또 다른 관계자는 “김호영이 쓴 ‘옥장판’이라는 말은 옥주현이 직접 캐스팅에 위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옥주현과 친분이 있는 이들로 캐스팅이 꾸려진 것 자체만을 비판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나. 그걸 언론이 확대 해석한 것이라면 애초에 명예훼손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며 “고소를 그대로 진행해도 패소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이고, 취하해도 이미 뮤지컬계가 등을 돌렸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만 남게 되니 어떻게 해도 좋은 결과가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한편 1세대들의 성명문 이후 옥주현은 별다른 입장 발표를 하지 않고 있다. 현재 뮤지컬 ‘마타하리’에 출연 중이기에 입장 정리 조율이 쉽지 않다는 게 옥주현 측 관계자의 이야기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