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해 법령 정의 없고 유족들 쉬쉬…통계수치 없어 사회적 논의도 이뤄지지 않아
업무자살은 업무상 과로 또는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 극단적 선택을 의미한다. 기계 끼임·압박 사고 등과 같이 사망 원인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증거를 수집하기 어렵다. △망인의 평소 기질(개인의 성격적 소질)이 어떤지 △망인이 업무 투입 전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는지 △업무 투입 전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면 업무 과정에서 어떤 것이 망인을 극단적 선택에 내몰았는지 △업무 투입 전 정신질환을 앓고 있지 않았다면 무엇이 망인에 정신질환을 발생시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는지 등 자살과 망인의 성격·업무 환경 사이의 인과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시민사회단체, 정치권 등에서도 업무자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지만 전문가들은 그 심각성이 아직 사회에 잘 전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업무자살률 통계조차 측정되지 않고 있다. 가뜩이나 업무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증거 수집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 수치조차 명확하지 않아 업무자살의 심각성에 대한 국민 체감도가 높지 않다. 전문가들은 업무자살에 대한 정확한 수치를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산재 관련 전문들은 현재 업무자살에 대한 법적 정의가 없고, 업무자살 관련 공식 통계수치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어 업무자살에 대한 실무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업무자살에 대한 국민 체감도가 높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근로복지공단 내 업무자살 조사 인원이 턱없이 부족한 것도 이에 기인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대한민국 법령에는 업무자살을 포함해 과로사라는 개념이 없다. 현재 쓰이고 있는 ‘과로사’는 일본에서 가져왔다. 일본은 2014년부터 ‘과로사 등 방지대책추진법’을 시행해 ‘업무로 인한 사망’을 사회적 타살로 규정하고 있다. 한인임 일과건강 사무처장은 “일본 법령에서 과로는 △장시간 노동 △정신적 압박감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라고 규정한다. 이에 따라 (일본 법령에서 정의하는) 과로사·업무자살은 장시간 노동, 정신적 압박감, 스트레스에 따라 발생한 뇌심혈관계질환, 정신질환으로 인한 사망이라고 정의한다”며 “우리나라는 이 정의조차 마련돼 있지 않으니 (과로사·업무자살에 대한) 정확한 수치도 확인할 수 없다. 결국 현재 국내에서 과로사·업무자살이 발생하면 일본에서 내린 정의를 가지고 업무로 인해 사망했다는 인과관계를 파악해 산재라고 호소하는 방법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민간공익단체 직장갑질119와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실에서 근로복지공단에 요청해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7~2021년 5년간 정신질환으로 사망했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된 근로자 수는 489명이다. 시기별로 보면 △2017년 77명 △2018년 95명 △2019년 72명 △2020년 87명 △2021년 158명이다. 이 중 산재로 승인된 근로자는 같은 기간 316명으로 △2017년 44명 △2018년 76명 △2019년 47명 △2020년 61명 △2021년 88명이다.
법무법인 마중의 김용준 대표 변호사는 “보건복지부에서 통계 낸 자료에 따르면 한 해 국내 자살자 수는 1만 4000여 명이며 이 중 직장인이 7000여 명인데 산재를 신청한 수는 겨우 100여 명”이라며 “국내 업무자살률은 더 높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살'이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업무자살의 심각성이 알려지지 않는 이유다. 업무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해도 유족들이 이를 쉬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과로사과로자살유가족모임 한 관계자는 “우리 사회에서 자살은 터부시될 뿐 아니라 사건이 발생하면 ‘가정에서 돌보지 않고 뭐 했느냐’며 책임을 회사가 아닌 가족에게 돌리기도 한다”며 “결국 유족들은 자살이라는 사회의 부정적 인식과 가족을 챙기지 않았다는 비난 여론이 두려워 업무자살을 알리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실제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2020 심리부검 면담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망인의 극단적 선택 사실을 알리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응답한 유족은 전체 157명 중 128명(81.5%)이다. 조사에 참여한 유족 중 약 80%(124명)는 이로 인해 우울함을 경험하고 있다고 답했다.
업무 스트레스, 희망퇴직 압박 등으로 형부를 잃은 배 아무개 씨는 “나 역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고 주변 시선이 신경 쓰이기 때문에 회사에 이의를 제기하고 산재를 신청할지 아니면 조용히 장례를 치를지 꽤 오래 고민했다”며 “노동자가 업무 스트레스로 사망한다는 것은 사회적 책임이 있는 것으로서 업무자살은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고민을 거듭한 배 씨는 산재 신청을 했으며 승인을 받았다.
김용준 변호사는 “업무자살은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봐야 한다”며 “조속히 업무로 인한 사망 자체의 정의를 내리고 (업무로 인한 사망의) 정확한 통계를 통해 재발방지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용준 변호사는 또 “자살이라고 하면 이를 제대로 알아보기보다 ‘멘탈이 약하다’며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하는데 업무자살은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절망감과 무기력감을 느껴 발생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며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와 직장이 망인에게 어떤 절망감과 무기력감을 안기게 했는지 먼저 생각하고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ㆍ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소영·김상래 기자 upjs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