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문제로 치부 말고 조직문화·노동강도 등 업무환경 따져야·…법 조항 구체적 개정 필요
업무자살은 장시간 노동, 업무특성, 동료관계, 조직문화, 노동 강도 등 근로자가 속해 있는 환경적 요인으로 발생한다. 하지만 현장에선 그 원인을 망인의 개인 문제로 몰아가기 일쑤다.
2020년 12월 경기 용인시 한 고등학교에서 동료들의 따돌림으로 스트레스를 호소하던 교사 최 아무개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 내사보고서와 신경정신과 의무기록지, 동료교사의 통화 녹취록 등에 따르면 최 씨는 따돌림으로 평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직장동료는 경찰 진술조사에서 “최 씨는 평소 직장에서 밝고 활발한 성격이었지만 같은 교무실을 사용하는 A 씨가 따돌림을 받자 이를 도와주었고 A 씨를 챙겨준다는 이유로 최 씨도 왕따를 당해 힘들어 했다”며 “최 씨에게 말을 걸지 않거나 식사시 의견을 묻지 않는 등 사소한 것이 주된 괴롭힘이었다”고 증언했다.
따돌림은 직장 내 괴롭힘 유형 중 하나로 따돌림으로 인한 극단적 선택은 업무상 재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따돌림은 중대한 학대에 준하는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며 “망인의 스트레스가 의무기록에 충분히 기술되면 업무자살로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인사혁신처는 최 씨의 사망이 업무상 재해라고 판단되지 않는다며 순직유족급여 신청을 불승인했다.
2020년 8월 한 대기업 기숙사에서 근로자 안 아무개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안 씨의 지인들은 진술서를 통해 “많은 양의 업무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임금, 관계 맺음의 어려움 등을 토로했다”, “평소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던 친구인데 당시 ‘지금 직장에서 힘들다. 이직할까?’ 등의 이야기를 꺼냈다”, “웃음이 많고 밝은 성격이었는데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에 대한 어려움을 밝혔다”고 전했다. 경찰 보고서에는 ‘업무 스트레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해 사망한 것으로 판단될 뿐’이라고 적혀 있다.
해당 대기업 측은 “근로복지공단의 유족급여 승인이 나려면 업무상 재해가 인정돼야 하는데 사건 이후 망인과 관련해 동료 직원들은 ‘(사내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며 “산재 승인 판단이 나오기 전까지 근로복지공단 조사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37조2항에는 ‘근로자의 고의·자해행위나 범죄행위 또는 그것이 원인이 돼 발생한 부상·질병·장해 또는 사망은 업무상의 재해로 보지 아니한다. 다만 그 부상·질병·장해 또는 사망이 정상적인 인식능력 등이 뚜렷하게 저하된 상태에서 한 행위로 발생한 경우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유가 있으면 업무상의 재해로 본다’고 명시돼 있다. 여기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유’는 △업무상의 사유로 발생한 정신질환으로 치료를 받았거나 받고 있는 사람이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하는 경우 △업무상의 재해로 요양 중인 사람이 그 업무상의 재해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하는 경우 △그 밖에 업무상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하였다는 것이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다.
해당 법에선 업무자살이 인정되려면 △망인이 정신질환을 앓았다는 것 △정신질환이 업무로 인해 발생했다는 것을 이중 증명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개인의 기질 또는 취약성이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노동사건 전문 손승주 변호사는 “개인의 취약성은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운동장 5바퀴 돌았는데 괜찮고, 어떤 사람은 5바퀴 돌았는데 힘들 수 있다”며 “그래서 학문적으로 몇 %의 업무상 요인으로 업무자살이 발생했다고 판단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최근 대법원에선 업무와 극단적 선택 사이의 인과관계를 파악할 때 개인의 취약성을 반영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2014년 10월 30일, 2015년 1월 15일 대법원에서 내린 판결문에는 ‘망인의 내성적인 성격 등 개인적인 취약성이 자살을 결의하게 된 데에 영향을 미쳤다거나 자살 직전에 환각, 망상, 와해된 언행 등의 정신병적 증상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여 (업무상 재해를) 달리 볼 것은 아니다’라고 적혀 있다.
전문가들은 업무자살 발생 전 개인의 취약성을 고려해 극단적 선택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기질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법무법인 마중 김용준 대표 변호사는 “직장에서 근로자 개인의 직무에 따른 정신적 스트레스 여부를 파악하고 기록하며 관리해야 한다”며 “나아가 매년 정신건강 검진 의무화를 실시하는 등 사회 전반적으로 (근로자의 정신건강에 대한) 관리가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업무자살을 막기 위해선 근로자와 가장 가까운 구성원들의 협조도 중요하다. 김은선 오늘의마음심리상담센터 원장은 “가족은 개인이 가장 가깝게 마음을 열 수 있는 구성원”이라며 “한 개인이 업무로 인해 힘들어 하거나 성격의 변화가 나타나는 모습이 보이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ㆍ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소영 기자 upjs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