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단 압박·존재감 과시, 도랑 치고 가재 잡기?
“지난 5년간 휴일 없이 일하다보니 개인적으로 많이 피로하고 체력적으로 감당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박병엽 팬택 부회장이 밝힌 사퇴의 변이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팬택 관계자는 “누구라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그만둘 수 있는 것 아니냐”면서도 “다만 워크아웃 중이니 채권단과 협의는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박 부회장은 채권단과 협의도 하지 않았다.
팬택의 임직원들은 ‘박 부회장 없이는 안 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채권단도 박 부회장 없이는 워크아웃을 제대로 진행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박 부회장의 사퇴 카드에 숨은 뜻이 있다는 분석을 가능케 한다.
박 부회장의 사퇴 발표는 ‘채권단 압박용’이라는 해석이 가장 많다. 팬택이 올해 말로 워크아웃에서 졸업하기로 돼 있지만 채권단 내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해 지지부진해지는 등 뜻대로 되지 않자 사퇴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것. 박 부회장은 사퇴 발표 후 채권단에 대한 섭섭함을 진하게 나타낸 것으로 알려졌다.
워크아웃 절차에 밝은 대기업 관계자는 “채권단에 소속된 은행이 한두 군데라면 합의하기 쉽겠지만 보통 10여 곳이어서 채권단 내에서도 합의점을 찾기 쉽지 않다. 이것이 경영진을 속 타게 한다”면서 “경영진 입장에서는 차라리 법정관리가 낫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워크아웃은 은행권에 피를 빨리는 일”이라고 성토했다. 팬택의 주채권은행은 산업은행 국민은행 우리은행 등 11곳이다.
박 부회장의 사퇴 발표 후 하루 만에 채권단은 올해 안에 팬택을 워크아웃에서 졸업시키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지지부진하던 일이 박 부회장의 사퇴 발표 후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 박 부회장의 사퇴 발표가 ‘채권단 압박용’이라면 큰 효과를 본 셈이다.
일각에서는 박 부회장이 온갖 혜택을 다 받고 난 후 ‘꼼수’를 부린다는 분석도 나왔다. 스마트폰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17분기 연속 흑자를 기록하는 등 공이 대단하지만 당초 팬택이 워크아웃에 들어간 데는 명백히 팬택앤큐리텔의 대표이사였던 박 부회장의 책임이 크다는 것. 비록 지분을 모두 내놓고 백의종군했지만 경영권에다 훗날 10%의 우선매수청구권, 스톡옵션 등 채권단에 받은 것이 많은 박 부회장이 이제 와서 본인의 존재가치를 무기로 채권단에 칼을 꽂은 셈이라는 얘기다.
박 부회장은 지난 8일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을 찾아 류희경 부행장에게 채권단과 협의 없이 갑작스레 사퇴 발표를 한 것에 대해 사과한 후 미국으로 출국했다. 현재로서는 박 부회장의 조기 복귀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채권단이 강력히 바라고 있다. 팬택의 상징 박병엽 부회장 존재 여부에 따라 지분 매각 시 가격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팬택 임직원들도 박병엽 부회장이 돌아오기를 희망하고 있다. 팬택 관계자는 “부회장께서 따로 말한 바는 없지만 복귀 가능성은 열려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만약 복귀한다면 박 부회장이 얻는 것은 상당히 많을 듯하다. 특히 올해 워크아웃에서 졸업하고 내년부터 채권단 간섭 없이 대표이사로서 본인의 경영 스타일을 펼쳐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경영권이라는 크나큰 벽이 가로막고 있다. 워크아웃 졸업 후 박 부회장이 경영권을 가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채권단에 받은 10%의 우선매수청구권이 있지만 이것으로 경영권을 장악하기는 무리다. 박 부회장이 부여받은 우선매수청구권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부실경영에 책임이 있는 구(舊)사주에게 우선매수청구권을 주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논란이 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