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 시장 “장기전세 3만 3000채 다 팔면 36조 원” 구체적 수치 밝혀…서울시 “확정된 것 아냐” 진화
오 시장은 8월 1일 오후 싱가포르의 고품질 공공주택 ‘피나클 앳 덕스톤’(피나클)을 방문해 “하계 5단지의 미래”라며 고품질 공공주택을 짓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피나클은 높이 50층의 공공주택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공공주택이다. 오 시장은 하계 5단지에 용적률 435%를 적용해 초고층 공공주택으로 고밀 개발하겠다고 했다.
오 시장은 피나클 단지 내부와 최고층에 위치한 공중정원을 둘러보며 기존 임대주택 재건축을 통해 중‧저임금 근로자를 위해 도심, 역세권에 품질 좋고 저렴한 주택 공급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현장에 동행한 서울주택도시공사 김헌동 사장도 “서울시와 SH가 보유한 400개 단지 22만 채를 이런 방식으로 개발하면 50만 채 가까운 물량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다”고 거들었다.
그런데 문제의 발언은 재원에 대한 질문에서 나왔다. 기자들이 재원 마련 방식에 관해 묻자 오 시장은 “SH가 보유한 장기전세주택 3만 3000채를 20년 만기가 됐을 때 다 팔면 단순히 계산해도 36조 원의 자산이 생긴다”면서 “이것 외에 임대주택 건설에 대한 정부 보조금까지 활용하면 재원은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장기전세주택 3만 3000채를 다 판다”는 발언에 무주택 서민들은 “서울시 장기전세주택이 사라지는 것이냐”고 걱정하고 나섰다.
서울시 시프트(SHIFT)는 2007년 서울시와 서울주택도시공사가 중산층을 위한 주거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처음 공급한 장기전세주택이다. 주변 전세 시세의 80% 이내로 최장 20년 동안 거주할 수 있어 주택 매입 같은 다음 단계로의 주거로 상향하기 위한 디딤돌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지난 정권의 부동산 정책 실패로 집값과 전셋값이 급등하고 민간에서 전세 사기가 들끓자 시프트의 가치는 더 빛났다. 전세난으로 민간 세입자들이 발을 동동 구를 때 시프트 입주자들은 주변 시세보다 훨씬 저렴하고 안전하게 전세 계약을 체결해 거주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시프트는 오세훈 시장이 도입한 주택 정책이다. 2006년 처음 서울시장에 당선된 오 시장은 1년간 철저한 준비를 통해 2007년 시프트를 론칭했다. 시프트는 공급 첫해부터 인기였고 1만 244세대가 공급된 2010년에는 당시 주택난과 맞물려 상당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시프트는 현재 3만 3000세대가 공급돼 서울 시민의 보금자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매달 SH에 월세를 내야 하는 국민임대와 비교해도 시프트는 주거 사다리를 오를 기회로 여겨진다. 모집 공고마다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은 기본이고 500 대 1의 경쟁률을 넘긴 적이 있을 정도로 무주택 서민들이 가장 입주하고 싶어 하는 공공주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오 시장의 장기전세주택 매각 발언은 무주택자들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일각에선 “주거 사다리를 없애겠다는 뜻이 아닌가”라는 우려도 나온다.
36조 원이라는 재원의 구체적 수치를 추계했다는 것은 장기전세주택을 매각하겠다는 계획이 서울시에서 논의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시 공공임대주택 정책을 총괄하는 주택정책실에 재원 마련을 위해 장기전세주택의 매각을 논의한 적이 있는지 묻자 “논의한 적은 있다. 하지만 그걸 착수했다거나 확정된 것은 아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담당자는 “재원 마련 문제는 시프트를 매각하는 방법도 있고 국고 보조를 요청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리고 장기전세 매각은 옛날부터 계속 있었던 얘기”라고 선을 그었다.
장기전세주택이 중단 수순으로 가는 것이냐는 질문에는 “시프트는 올해도 공급되고 꾸준히 공급될 예정이다. 택지를 조성해서 건설형으로 짓는 것도 있지만 민간 재정비 사업(재개발, 재건축)에서도 장기전세가 나온다. 또 한 번에 3만 3000세대를 매각하는 게 아니라 매년 20년이 도래한 물량만큼만 매각하는 것”이라며 “매각이 확정된 것이 아니다”라고 진화에 나섰다.
서울주택도시공사 주택관리현황에 따르면 올해 신규 입주 예정 장기전세주택 수는 339세대다. 지난 16년간 연평균 2000세대가 공급된 것에 비하면 최근 공급 물량은 지속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서울시 계획대로라면 계약 만료 가구가 재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매각으로 사라지는 셈이라 장기전세주택 입주를 희망하는 시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한 국민임대 임차인은 “집값이 너무 올라 살 엄두도 안 나는데 장기전세마저 줄이면 매달 이렇게 월세 내고 사는 수밖에 없다. 전세를 없앤다는 건 월세 내고 살라는 뜻 아닌가,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김창의 경인본부 기자 ilyo2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