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적 디플레이션에 역대급 엔저 겹쳐 ‘저렴’…해외 투자자들 유명 온천지 숙박시설 현찰로 ‘턱’
“가족이 별장처럼 묵을 수 있는 료칸(일본 전통 여관)을 사고 싶어요.” 일본의 유명 온천마을에 해외 투자자들이 몰리고 있다. 홍콩에서 회사를 운영하는 한 남성은 최근 4억 엔대(약 40억 원)에 하코네 료칸을 현찰로 매입했다. 그는 “일본의 다른 지역 부동산도 구입하고 싶다”며 그 배경으로 기록적인 ‘엔화 약세’를 꼽았다.
연초만 해도 엔화 환율은 달러당 115엔 정도였으나, 8월 들어 134엔까지 가치가 하락했다. 외국인 입장에선 20% 정도 가격이 저렴해진 셈이다. 아사히TV에 따르면 “이를 기회라 여기고 호텔이나 료칸을 매각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코로나19 사태로 문 한 번 열지 못한 신축 호텔이 매물로 나오기도 했다. ‘2020 도쿄올림픽’ 특수를 노리고 건설했지만 직격탄을 맞은 경우다.
쓰지 유지 호텔료칸경영연구소 대표는 “특히 료칸업계가 관광객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장기간 코로나가 이어져 수입이 거의 없고, 늘어난 빚을 단숨에 갚기 위해 료칸을 매각하려는 것이다. 료칸 가업을 이을 ‘후계자가 없다’는 점도 이유다. 쓰지 대표는 “매입자들이 대부분 중국이나 홍콩 쪽의 부유층들”이라며 “보통 현찰로 일괄구매하기 때문에 파는 입장에서도 유리하다”고 덧붙였다.
NHK의 시사프로그램 ‘클로즈업현대’는 외국인들이 일본 부동산을 매수하는 배경에 대해 집중 보도하기도 했다. 2000년부터 2020년까지 세계 물가상승률을 보면, 일본만 마이너스다. 고질적인 디플레이션 때문이다. 가령 홍콩의 집값은 무려 8배나 올랐다. 캐나다는 2.8배, 미국은 1.8배 등 대부분의 나라가 상승했으나 일본은 오히려 가격이 떨어졌다.
최근엔 일본 역시 물가가 상승하고 있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여전히 낮은 상황이다. 게다가 일본 정부가 초저금리 기조를 유지하면서 ‘역대급 엔저’가 진행 중이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싼 가격에 살 수 있는 기회이니, 일본 부동산에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다. 이른바 ‘바겐세일’과도 같은 상황이다.
홍콩에서 부동산회사를 운영하는 글라스 우 씨는 주로 일본 관광지의 호텔과 주택 등을 중개하고 있다. 개중에는 10억 엔이 넘는 물건도 있지만, 부유층들로부터 문의가 쇄도한다. 예를 들어 홍콩의 경우 70m²의 매물이 2억 엔 이상에 거래되는 반면, 일본은 비슷한 가격에 100m² 이상의 물건을 살 수 있는 것. 신축이 아니라면 더 넓은 물건도 매수가 가능하다.
약 35년 전, 거품경제 시대 일본은 세계의 부동산을 사들이는 입장이었다. 당시 일본의 주가는 연일 치솟았으며 엔화 강세도 이어졌다. 뉴욕의 상징 중 하나인 ‘록펠러센터’를 일본 기업이 매수하는가 하면,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 있는 상당수의 호텔도 일본 기업들이 사들였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의 입장이 됐다.
글라스 씨는 “단순히 가격이 저렴해서만은 아니다”고 말했다. “일본 부동산의 경우 잠재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성장주’로 보는 시각이 많다”는 설명이다. 그 또한 “관광지 전망이 밝다고 생각해 일본의 숙박시설을 사뒀다”고 한다. 임대하면 이익이 나오고, 장래 가격상승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전문 부동산 중개업체인 ‘와가야재팬’에 따르면 “원래 미국과 중국, 홍콩으로부터 투자 문의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동남아에서도 매입 의뢰가 부쩍 늘었다. 말레이시아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니콜 탄 씨는 일본 리조트 개발에 30억 엔 규모의 투자를 했다.
니콜 씨는 “일본의 부동산이 동남아만큼 싸지는 않지만 인프라가 갖춰져 있고, 치안이 좋으며 사람들이 매우 친절해 여행하기 좋은 나라”라고 전했다. 그래서 “일본에 투자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미국과 유럽의 경우 코로나19 사태로 교외 휴양지 부동산 가격이 많이 올랐다”면서 “일본도 입국 규제가 풀리면 휴양지의 부동산 가격이 분명히 더 오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엔저 현상이 나타났던 2007년과 2014년에도 외국인의 일본 부동산 투자가 급증했는데, 올해도 그런 트렌드가 이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1조 엔(9조 7700억 원)이 넘는 글로벌 자금이 일본 부동산 시장으로 유입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해외에서 매입 문의가 잇따르고 있는 일본 부동산. ‘사는 일본’에서 ‘팔리는 일본’으로 역전된 배경에 대해, 메이지대학의 노자와 치에 교수는 “숙박사업의 경영부진, 상권인구의 감소, 후계자 부족 등 이제 내수만으로는 국내 경제를 돌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으로는 과제도 보이기 시작했다. 일례로 니가타현 아카쿠라온천은 여름엔 자연이 아름다운 휴양지로, 겨울엔 스노 리조트로서 1980년대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거품경제와 스키 붐이 꺼지면서 관광객이 격감. 코로나 사태까지 겪으면서 매물이 쏟아져 나왔다. 현재 66개 숙박시설 중 17곳 정도가 외국인이 경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동시에 지역 커뮤니티도 사라져가고 있다. 홋카이도 니세코의 자연에 매료돼 40년 전부터 펜션을 운영해온 마미코 씨. 한때 140채의 펜션 동업자가 있었지만, 지금 남은 것은 10채 정도다. 대부분 해외 부유층이 펜션을 매수했으며, 친하게 지냈던 주민들은 마을을 떠났다.
외국인에게 팔렸지만 관리가 되지 않아 ‘빈집’이나 다름없는 숙박시설도 문제다. 코로나로 외국인 주인이 일본에 오지 못해 방치되고 있는 것. 지난 7월에는 빈집 상태였던 료칸에서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는 사건도 있었다. 또한 전매 목적으로 투자해 방치되는 숙소도 적지 않다. 영업을 하지 않기 때문에 현지에는 거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
아카쿠라온천관광협회의 나카지마 마사후미 회장은 “지역을 살리기 위해 외국인 경영자와도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관광객들이 좋아할 만한 지역을 만들기 위해서는 국적을 불문하고 현지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과 손을 잡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지역의 새로운 매력을 창출하기 위한 모색이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