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에 대한 공포가 인간의 자만으로 이어지는 순간, 영화는 시작된다
오는 17일 개봉하는 조던 필의 세 번째 장편 연출작 '놉'(NOPE)은 러닝타임 내내 그야말로 경이의 연속을 보여주고 있다. 거대한 이야기는 수 개의 챕터로 구성돼 있고, 각각의 챕터는 결말과 어우러지면서 관객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상상하게끔 길을 터준다. 다소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였던 조던 필의 전작 '어스'(2019)나 '겟 아웃'(2017)과 달리 코스믹 호러라는 큰 장르 아래 가족애가 담긴 드라마와 발랄한 유머 코드도 심어져 관객들의 어깨에 힘을 풀 수 있도록 하는 배려가 새롭게 마련된 점도 눈에 띈다.
대대로 말 농장을 운영해 온 헤이우드 가족을 중심으로 한 '놉'은 어느날 헤이우드 가의 가장이었던 아버지가 하늘에서 떨어진 물건에 맞아 사망하는 기이한 사건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훈련시킨 말들을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시키는 사업을 하며 돈을 벌어온 장남 OJ(대니얼 칼루야 분)는 아버지의 사망 후 어려워진 가정을 일으키기 위해 여동생 에메랄드(케케 파머 분)와 함께 고군분투하지만 영 순탄하지 않다.
그러던 중 남매는 아버지의 사망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심상치 않은 사건의 전조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헤이우드 목장을 중심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비행물체가 출현해 아버지를 사망에 이르게 한 물건들을 지상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던 것.
남매는 이 미확인 물체가 'UFO'임을 확신하고 영상을 찍어 한몫을 단단히 챙기기로 결심한다. 19세기 후반, 움직이는 흑백 영화의 첫 등장인물이었던 흑인 기수의 자손들이지만 끝내 배우나 연출자가 되지 못하고 영화의 변두리를 맴돌던 이들이 '진짜 영화'의 출연진이자 감독이 되는 순간이다.
UFO는 이 영화 속, 남매가 찍고자 하는 '영화'의 가장 크고 두려운 적으로 남는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기에 철저하게 카메라 렌즈와 녹화된 화면을 통해서만 그의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 영화 속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들 역시 이 경외로운 존재에게 단순히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피사체 이상의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도 이렇게 간접적으로 전달된 공포의 학습으로 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던 필은 '놉'에서 이 UFO에 대한 상반된 시선을 통해 그 시선의 주인들이 각자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성공할 수 있는 최초이자 최후의 기회가 될 것을 알지만 두려움에 압도돼 고뇌하는 헤이우드 남매와, 그 두려움이 자신에게만큼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란 자신감으로 가득한 주프(스티브 연 분) 가족의 대비다.
아역 출신으로 현재는 헤이우드 농장 인근에서 서부극 테마파크를 운영하는 주프는 아역배우로 활동하던 때 끔찍한 공포를 겪고도 살아남았기에 오히려 자신은 선택받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신감 넘치는 인물이다. UFO를 제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주프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헤이우드 남매의 각자의 챕터에 따라 흘러가는 결말은 관객들로 하여금 이 영화를 오래도록 해석하게 만드는 숙제를 던져주기도 한다.
후반부에 이르러 정체를 드러낸 '그것'의 본모습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응축한 하나의 유기체이자 무기체로서 관객을 압도한다. 스크린이자 무대이며 배우이자 연출자인 그것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열연하는 그 모습은, 이 장면만을 위해 '놉'을 관람하기로 마음 먹은 관객들이 자신의 결정에 충분히 자만해도 되게끔 만들고 있다. 올해 개봉 영화 중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을 꼽는다면 적게 잡아도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결말임은 분명해 보인다.
'놉'은 나훔서 3장 6절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로부터 시작된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땅의 잔해들이 과연 인간들에게 던져져 그들을 능욕하고 구경거리가 되도록 하는지. 그게 아니라면 그것들을 던진 'UFO'가 도리어 구경거리가 되는지 조던 필은 관객들에게 모든 해석의 끈을 쥐어주며 원하는 길을 따라가도록 독려한다.
이 영화가 조던 필의 최고의 작품이 되겠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존하는' 조던 필의 최고의 작품이냐면, 그럴 것이다. 어떤 해석을 맞이하든 관객들은 그 선택에 만족할 것이고 조던 필은 또 다음 걸음에서 새로운 걸작을 만들어 낼 테니까. 집 안에서 지하와 지상으로, 그리고 하늘로까지 옮겨진 조던 필의 세계가 어디까지 확장 되든 따라갈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130분, 12세 이상 관람가. 17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