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홀스 ‘700홈런 고지’ 눈앞, 이대호 ‘타격 3위’ 올라…팬들 은퇴 만류 쇄도
물론 가끔은 세월의 흐름을 잠시 멎게 하는 선수가 있다. 스즈키 이치로는 43세에 메이저리그(MLB) 통산 3000안타를 달성하면서 '롱런'의 모범 사례를 만들었다. 배리 본즈는 마흔 살이던 2004년에 내셔널리그(NL)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 제이미 모이어는 48세에 완봉승을 올렸고, 랜디 존슨은 41세였던 2004년, MLB 역대 최고령 퍼펙트게임 기록을 100년 만에 갈아치웠다.
올해도 무시무시한 '40대 파워'를 보여주는 선수가 두 명 있다. MLB의 앨버트 푸홀스(42·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KBO리그의 이대호(40·롯데 자이언츠)다. 두 선수는 모두 각자의 팀에서 '올 타임 레전드'로 이름을 날렸고, 나란히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예고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녹슬지 않은 기량을 뽐내면서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푸홀스 '명예의 전당' 예약
푸홀스는 2001년부터 22년간 MLB에서 뛰고 있는 베테랑 선수다. 홈런뿐 아니라 통산 타점(3위)과 안타(10위)도 MLB 정상급이다. 이변이 없는 한 은퇴 후 명예의 전당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현역 마지막 시즌을 뜻 깊게 마무리하기 위해 지난 3월 세인트루이스와 연봉 250만 달러에 1년 계약했다. 은퇴를 앞두고 11년 만에 친정팀 품에 안겼다.
푸홀스가 세인트루이스로 돌아간 이유가 있다. 세인트루이스는 그를 세상에 내놓은 팀이다. 그는 데뷔 첫해부터 2011년까지 11년간 세인트루이스에 몸 담으면서 홈런 445개를 치고 1329타점을 올렸다. 그 사이 NL MVP와 신인상을 수상했고, 2006년과 2011년엔 두 차례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세인트루이스 역사상 최고의 타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푸홀스는 2012년 LA 에인절스와 10년 2억 5400만 달러에 계약해 이적했다. 그럼에도 세인트루이스 팬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푸홀스가 이적 후 8년 만인 2019년 6월 세인트루이스에서 첫 원정경기를 치르자 홈 구장 부시스타디움 관중석을 꽉 채웠다. 푸홀스가 1회 첫 타석에 들어서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로 옛 영웅을 맞이했다. 세인트루이스 팬들은 3연전 내내 푸홀스가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아낌없는 기립박수를 보냈으며 그가 홈런을 쳤을 때는 마치 자기 팀 선수가 친 것마냥 갈채를 보냈다. 푸홀스는 마지막날 마지막 타석에서 결국 눈물을 글썽이며 팬들에게 감사를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현역 선수로서 마지막 시즌을 세인트루이스에서 보내기로 했다.
복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세인트루이스를 명문 구단 반열에 올려 놓은 타자 푸홀스, 투수 애덤 웨인라이트(41), 포수 야디에르 몰리나(40) 트리오가 다시 같은 유니폼을 입고 모였기 때문이다. 올 시즌 세인트루이스의 개막전은 이들의 '합체'를 기념하는 이벤트로 채워졌다. 팬들은 이들이 한 더그아웃에서 함께하는 모습에 감동했다.
푸홀스는 '존재'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올 시즌 그는 8월까지 81경기에 출장해 타율 0.269, OPS(출루율+장타율) 0.857을 기록하고 있다. 전성기 성적에는 못 미치지만 은퇴 직전 시즌 성적으로는 충분히 훌륭하다. 이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시즌을 마친다면 그는 2012시즌 이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OPS 0.800를 넘긴다.
그는 또 8월까지 홈런 15개를 쳐 통산 홈런 694개를 기록하고 있다. MLB 역사에서 푸홀스보다 많은 홈런을 친 선수는 본즈(762개), 행크 에런(755개), 베이브 루스(714개), 알렉스 로드리게스(696개)밖에 없다. 푸홀스가 남은 31경기에서 홈런 3개를 때려내면 로드리게스를 넘어 역대 4위로 올라선다. MLB 역대 4번째 꿈의 700홈런 고지까지는 6개만 남겨뒀다.
특히 8월의 푸홀스는 전성기 시절 못지 않게 뜨거웠다. 월간 타율이 0.361이고, OPS는 1.223(출루율 0.420, 장타율 0.803)에 달한다. 한 달 동안 올 시즌 홈런 수의 절반이 넘는 8개를 몰아쳤다. 전반기 53경기에서 홈런 6개를 친 그가 후반기 28경기에서 9번의 아치를 그렸다. 8월 23일에는 팀 동료 폴 골드슈미트와 함께 10년 만에 NL '이주의 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개인 통산 13번째 수상이다. 이 상을 푸홀스보다 더 많이 받은 선수는 미겔 카브레라, 매니 라미레스(이상 16회), 본즈(15회), 프랭크 토머스(14회)밖에 없다.
야구 인생에 남을 명장면도 추가했다. 푸홀스는 웨인라이트가 7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한 8월 19일 콜로라도 로키스전에 대타로 나와 만루홈런을 쳤다. 스포츠 기록 전문업체 엘리아스 스포츠는 "40대 타자가 만루홈런을 치고 40대 투수가 7이닝 이상 무실점을 기록해 승리를 이끈 경기는 MLB 역사상 처음"이라고 전했다. 푸홀스와 오랜 우정을 나눠 온 웨인라이트는 "난 그저 푸홀스의 대기록을 망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라고 했다.
이뿐 아니다. 8월 20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전에서 연타석 홈런을 때려내 올 시즌 세 번째 멀티 홈런(한 경기 2홈런 이상) 경기를 펼쳤다. 42세 선수가 한 시즌에 3경기 이상 멀티 홈런을 기록한 것 역시 MLB 역대 최초다. 멀어진 듯했던 '통산 700홈런' 고지가 다시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이다.
세인트루이스 팬들은 서서히 푸홀스를 향해 "은퇴를 1년만 미뤄달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올 시즌 안에 700홈런을 달성하지 못하면, 내년에도 그라운드에 남아 700개를 채워달라는 의미다. 푸홀스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계획대로 하겠다"고 했다. "홈런 693개든, 696개든, 700개든 상관 없이 은퇴할 생각이다. 22년 전의 내가 나 자신에게 '이 정도로 많은 홈런을 칠 수 있겠냐'고 물었다면 '미쳤다'고 대답했을 거다. 나는 할 만큼 했다"며 웃었다.
푸홀스는 스스로를 '축복받은 선수'라고 표현했다. "내가 MLB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큰 행운을 누렸는지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내 커리어는 '700홈런' 기록 없이도 충분히 놀랍고, 대단했다고 자부한다"며 "승리를 간절히 원하는 동료들과 함께 이렇게 좋은 팀에서 함께 뛰고 있는 것 자체가 좋다. 난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했다.
#이대호, 기념비적 은퇴 투어
이대호는 2010년 KBO리그 역사에 전무후무한 타격 7관왕의 발자취를 남긴 선수다. 그해 9경기 연속 홈런을 쳐 이 부문 세계기록도 세웠다. 한국에서만 빛난 것도 아니다. 2012년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해 리그 정상급 타자로 활약했고, 2016년엔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1년간 MLB 무대도 경험했다. 또 아시안게임, 올림픽, 월드베이스볼클래식, 프리미어12 등 주요 국제대회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중심타자 역할을 해냈다.
이대호는 롯데와 계약 종료를 앞둔 올 시즌 개막 전 "1년만 더 뛰고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KBO는 "그동안 KBO리그와 국제대회에서 활약했던 공로를 인정한다"며 이대호를 이승엽에 이은 역대 두 번째 은퇴 투어 주자로 선정했다.
출발지는 지난 7월 16일 열린 KBO 올스타전이었다. KBO는 스포츠 전문 아트 디렉터가 제작에 참여한 대형 액자를 이대호에게 선물했다. 액자에는 부산 사직구장을 배경으로 이대호의 고교 시절부터 현재까지 활약상을 담았다. 실제 사직구장에서 사용한 베이스와 그라운드 흙도 넣었다.
전국의 야구장을 도는 구단별 은퇴 투어도 어느덧 반환점을 돌았다. 7월 28일 서울 잠실구장(두산 베어스전), 8월 13일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 23일 창원 NC파크, 28일 인천 SSG랜더스필드를 거쳐 31일 서울 고척스카이돔 고별식까지 마쳤다.
각 구단도 고심 끝에 의미 있는 은퇴 선물을 준비했다. 구단별 투어의 첫 주자인 두산은 퓨처스(2군) 팀이 둥지를 튼 경기도 이천시의 특산품 '달항아리'를 전달했다. 항아리에는 이대호의 좌우명 '가장 큰 실패는 도전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문구를 새겼다. KIA 타이거즈는 2010년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탄생한 이대호의 9경기 연속 홈런 기록을 기억하는 의미로 무등구장 미니어처 트로피를 제작했다.
NC 다이노스는 이대호의 '시작'을 기념했다. 이대호는 NC가 홈으로 쓰던 마산구장에서 프로 데뷔전(2001년 9월 19일)과 국내 복귀전(2017년 3월 31일)을 모두 치렀다. NC는 두 경기의 기록지를 담은 액자와 마산구장 홈플레이트를 선물했다.
SSG 랜더스는 '조선의 4번 타자'라는 별명에서 착안한 조선시대 마패 기념품과 인천 문학야구장에서 나왔던 이대호의 데뷔 첫 홈런 기념구를 제작했다. SSG에서 뛰고 있는 동갑내기 고향 친구 추신수는 사비로 '간식차'를 주문했다. 간식차는 둘의 어린 시절과 국가대표 시절 사진 등으로 꾸며졌다. 키움은 고척돔 타석에 선 이대호를 형상화한 정밀 모형을 제작해 은퇴 선물로 전했다. 실제 고척돔 흙을 재료로 사용해 이대호와 고척돔의 인연을 추억했다.
이대호는 전 구단과 보내는 박수에 힘이라도 얻은 듯, 은퇴 전 마지막 시즌을 의미 있게 보내고 있다. 8월까지 116경기에서 타율 0.329를 기록해 호세 피렐라(삼성 라이온즈)와 이정후(키움)에 이어 타격 3위에 올라 있다. 얼마 전까지 타격왕 경쟁을 했을 정도로 나이를 무색케 하는 리그 정상급 활약을 펼치고 있다.
베테랑 선수들이 체력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여름도 거뜬히 넘겼다. 그는 8월 한 달 동안 결승타 5개를 쳐 피렐라와 공동 1위에 올랐고, 월간 타점도 22개로 피렐라·양의지(NC)와 공동 2위였다.
무엇보다 은퇴 투어가 진행된 경기마다 의미 있는 장면을 남겼다. 창원 은퇴 투어 기간인 지난달 24일 NC전에서 1-0으로 앞선 9회 초 2사 후 대타 솔로홈런을 터트려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선수 생활 내내 주전으로 뛰었기에 그의 대타 홈런은 개인 통산 3호 기록이다.
인천 고별전이던 지난 8월 28일 SSG전에선 1-2로 뒤진 7회 2사 1루에서 역전 결승 2점 홈런을 터트려 승리의 주역이 됐다. 고척 최종전인 지난달 31일 키움전에선 2타점을 추가해 통산 1400타점 고지도 밟았다. 이승엽과 최형우(KIA)에 이은 역대 세 번째이자 오른손 타자 최초의 기록이다.
이 정도로 뜨거운 은퇴 시즌을 보낸 선수는 이대호 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앞으로 9월 8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 18일 수원 KT위즈파크, 20일 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 22일 잠실구장(LG 트윈스전)에서 네 차례 더 은퇴 투어 행사를 남겨두고 있다. 그 여정이 모두 끝나면 올 시즌 부산 사직구장 최종전에서 KBO리그의 유일한 소속팀 롯데와 '진짜' 은퇴식을 치른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