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가까워야 할 엄마와 딸이지만, 서로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팽나무를 배경으로 펼쳐진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리가 예측하고 기대하는 방식으로는 포착되지 않아 우리가 알아채지도 못한 채 그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린 것 같은 우리의 ‘우연’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삶의 이유는, 그것은 우연이었다며 슬쩍 지나치는 것 속에 숨어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바로 나무가, 침묵하는 나무가 증인 같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땅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기분 좋게 빛을 먹고 성장하며 그 충만한 생명의 힘으로 침묵하고 있는 나무는, 뿌리 깊은 나무는 고독한 성자를 닮아있다.
그때 그 마을 입구에도 느티나무가, 오래된 느티나무가 큰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 옆에는 우물이 있었다. 거기선 아낙들이 종종 옹기종기 모여 빨래를 했다. 그 아낙들의 아이들은 느티나무를 배경으로 공기놀이도 하고, 고무줄도 하고, 팽이도 돌리며 엄마들의 울타리에서 맘껏 놀았다. 방학 때만 되면 나는 동생과 함께 그런 풍경이 있는 할아버지 댁에 가서 사나흘을 보내다 왔다. 그 시절, 우리의 휴가였고, 지금 내 추억의 창고를 지키고 있는 하나의 보물이기도 하다.
우영우의 팽나무로 인해 자극된 추억의 보물창고가 열려 성묘를 마치고 문득, 정말 오랜만에 느티나무가 터줏대감처럼 지키고 있을 그 마을을 찾아갔다. 그때 그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마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한눈에도 저기가 우리가 놀던 공간이라는 것을 알아봤지만, 이미 그 공간은 사라지고 없었다. 무엇보다도 동네어른들의 사랑방이었던 느티나무 그늘이 사라진 것이다. 느티나무가 사라졌으므로. 한순간에 맥이 빠졌다.
하긴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아버지가, 어머니가 돌아올 수 없는 먼 여행을 떠난 세월이니 느티나무가 사라진 일이 뭐 그리 대수겠는가. 그렇지만 내 안의 아이가 마음 놓고 기댈 추억에 찬물을 뒤집어쓴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내가 경험했던 일들이 현실이 아니라 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마음속을 허하게 했다.
이제는 ‘고전’이라고 불러도 될 책 중에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이 있다. 아무도 보지 않고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황무지에 묵묵히 나무를 심어가는 양치기 노인 엘제아르 부피에는 아내를 잃고 자식을 잃은 초로의 남자다. 지금 생각하니 그 당시 그는 지쳤다는 말도 사치였을 정도로 탈진한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쩌면 완전히 생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그는 묵묵히 나무를 심었다. 아마 그 일은 그의 생을 견디게 만든 기적이었을 것이다.
나무를 심는 그의 손길로 인해 황무지에서는 샘물이 흐르게 되고, 새가 날고, 마침내 숲이 이루어졌다. 묘한 것은 그로 인해 황무지처럼 황폐했던 사람들도 생기 있는 사람들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일 속에서 희망의 싹을 키워내는 자, 그야말로 스스로의 촉을 믿는 세상의 중심이지 않을까.
젊었을 때 나는 나무를 심는 부피에를 선한 사람의 모범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선한 사람이라기보다 선악을 넘어서 자기 생을 긍정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 나무 같은 사람이다.
나무를 심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무를 사랑하는.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 흙에 뿌리를 내리고 비를 머금어 샘물을 만드는,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 빛을 먹고 자라나는.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 바람의 노래를 만드는.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이테가 늘수록 누군가가 찾아와 편히 앉아 쉬다 갈 수 있는.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 새들이 와서 집을 짓고 지저귀는.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사 모르는 척 침묵할 줄 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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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