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케네디 장례식 참석 ‘쿠데타 인정에 대한 답례’…김대중, ‘통절한 반성’ 오부치 사망하자 직접 조문
엘리자베스 2세 장례식은 서거 이후 10일 동안 애도 기간을 거친 뒤인 9월 19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9월 11일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윤석열 대통령이 9월 19일 엘리자베스 2세 장례식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9월 20일 유엔총회 참석이 예정돼 있던 윤 대통령은 예정된 계획을 소화하기에 앞서 엘리자베스 2세 장례식에 참석한다.
장례식엔 세계 각국 지도자가 참석할 전망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한 애도를 표하면서 장례식 참석 여부를 확답한 바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장례식 참석 이후 윤 대통령은 미국 뉴욕에서 열릴 예정인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에 나선다. 그 다음으론 캐나다를 방문해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양자회담을 나선다. 유엔총회 과정에서 다수 양자회담 혹은 회동이 성사될 가능성이 점쳐진다.
영국과 미국, 캐나다를 도는 윤 대통령 순방 일정은 5박 7일로 예정돼 있다. 미리 예정돼 있던 굵직한 외교 일정에 앞서 엘리자베스 2세 장례식 참석 일정이 추가된 셈이다. 이번 순방엔 김건희 여사도 동행한다.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은 9월 12일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을 통해 “순방의 목적은 핵심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국들과 연대를 강화하고 경제 외교 기반을 확대하는 데 있다”면서 “첫 방문지인 런던에서 윤 대통령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에 참석해 영국민과 왕실에 깊은 위로의 뜻을 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국 대통령이 국외 정치인 장례식에 직접 참석한 첫 번째 사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겼다. 박 전 대통령은 1963년 11월 열린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 장례식에 직접 참석했다. 당시 신분은 대통령 당선인 겸 대통령 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다.
케네디 전 대통령 장례식에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데엔 ‘정치적 답례’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케네디 전 대통령은 생전에 박 전 대통령을 미국으로 초청한 바 있다. 5·16 군사정변 직후였다. 이 초청은 박 전 대통령 입장에선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정치적 당위성을 확보하는 절차로 여겨지기도 했다.
케네디 전 대통령은 불의의 암살 사건으로 서거했다.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을 초청해줬던 케네디 전 대통령 장례식장으로 발걸음을 지체 없이 옮겼다. 장례식엔 하인리히 뤼브케 서독 대통령, 샤를드 드골 프랑스 대통령,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 알렉 더글라스 흄 영국 총리 등이 참석해 조문외교의 장이 됐다.
박 전 대통령은 1967년 12월에도 조문 순방길에 올랐다. 해럴드 홀트 전 오스트레일리아 총리가 수영을 하던 도중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수색이 펼쳐졌지만 홀트 전 총리 행방은 묘연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홀트 전 총리가 숨진 것으로 간주하고 장례식을 열었다. 당시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는 베트남전 파병을 공통분모로 가지는 혈맹 관계였다. 박 전 대통령은 홀트 전 총리와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 전 대통령은 홀트 전 총리 장례식에 직접 참석해 조문했다.
이후 대통령이 조문을 목적으로 외국을 직접 순방하는 사례는 뜸했다. 국무총리나 외교부 장관이 대통령을 대신해 조문사절단으로 파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2000년 6월에 다시 한번 현직 대통령이 조문을 위해 직접 국외로 발걸음을 옮겼다. 행선지는 일본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 총리 장례식에 참석했다.
오부치 전 총리는 ‘김대중·오부치 선언(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주인공이다. 이 선언을 통해 오부치 전 총리는 과거 식민지배와 관련해 한국 국민에게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의 사죄’의 뜻을 공식적으로 전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한국 정부가 일본 대중문화 개방 조치를 시행하게 되는 발단이 되기도 했다.
오부치 전 총리는 2000년 4월 2일 새벽 재임 중 과로에 따른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2000년 5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2000년 6월 8일에 열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1세기 한일 협력 비전을 함께 공유한 파트너였던 오부치 전 총리를 직접 조문했다. 당시 장례식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자리를 함께했다.
김 전 대통령 다음으로 조문 순방을 나섰던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은 2015년 3월 23일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난 ‘싱가포르 국부’ 리콴유 전 총리 장례식을 직접 찾았다. 박 전 대통령이 리콴유 전 총리 조문을 직접 챙긴 배경으론 과거의 인연이 거론된다.
리콴유 전 총리는 자서전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거론했다. 자서전에 따르면 리콴유 총리는 1979년 10월 16일부터 22일까지 정상회담을 했다.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 마지막 정상회담이다. 리콴유는 “(정상회담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영애가 통역을 했다”고 적었다. 당시 영부인 대행 역할을 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리콴유 전 총리는 생전 미국 ‘타임’ 인터뷰를 통해 ‘위대한 아시아 3대 지도자’ 중 하나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꼽기도 했다.
친박계로 활동했던 한 정치권 인사는 “지금까지 대통령이 직접 해외로 조문을 갔던 사례를 살펴보면 현직 지도자가 세상을 떠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면서 “리콴유 전 총리의 경우엔 현직이 아니었음에도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조문에 나섰다.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인연 등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는 선택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당시 리콴유 전 총리 장례식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토니 에벳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등이 참석해 조문 외교전을 펼쳤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 장례식 이후 7년이 지난 2022년 9월 윤석열 대통령은 엘리자베스 2세 서거를 계기로 조문 외교전에 직접 나서게 됐다.
엘리자베스 2세 서거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장례식 참석을 빠르게 결정한 것과 관련해 외교가에선 ‘당연한 결정’이라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한 전직 외교관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가지고 있던 상징성이나 각종 국제관계를 고려할 때 이번 장례식은 한국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야 하는 게 맞다”면서 “유엔총회 일정과 장례식 일정이 맞물린 것은 윤 대통령 입장에서 국내 정치적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다만 외교전이 펼쳐지는 큰 무대에서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잔 실수’가 예상보다 더 큰 구설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윤 대통령이 이런 부분을 평소보다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