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씨 측 “기밀 누설 무혐의 나오니 별건으로 기소”…대북공작 라인 표적 수사 가능성 제기
2019년 5월 14일 서울 양재동 한 아파트에 검은 정장을 한 국정원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37년 군생활을 마친 예비역 대령 자택이었다. 압수수색 영장엔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라는 단어가 적시돼 있었다. 압수수색 이후 평생을 첩보전 일선에서 바친 예비역 대령은 간첩 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게 됐다. ‘베테랑 첩보요원’ 정규필 씨 이야기다.
그의 커리어는 화려하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37년 군생활을 마쳤다. 1986년 임관한 정 씨는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일명 ‘돼지부대’라 불리는 HID(국군 정보사 특임부대) 특수팀장으로 재직했다. 이후 첩보원 외길인생을 걸었다. 블랙과 화이트를 오가는 요원으로 활동하며 중국 현지에서만 14년을 근무했다. 국내에서 근무할 땐 정보사 공작장교, 해외과장, 국방정보본부 정보기획과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정 씨는 2019년 3월 31일 자신의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었다. 전역한 뒤 캐나다 밴쿠버로 떠났다. 결혼을 앞둔 장녀 상견례를 위해서였다. 정 씨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건 그해 5월 13일 오후 8시경. 귀국 당시 정 씨는 출국금지 상태였다. 여독이 채 풀리지 않았던 5월 14일 오전 7시 50분경, 누군가가 “차를 박았다”면서 문을 열어줄 것을 요청했다. 문을 열자 장정 여럿이 정 씨 자택으로 들어왔다. 28평 아파트가 장정으로 가득 찼다. 그들은 압수수색 영장을 제시했다. 군사기밀보호법(누설) 위반 혐의가 명시돼 있었다.
압수수색은 22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베란다, 옷장, 싱크대 아래까지 수색이 진행됐다. 국정원은 집안에 있는 1위안 동전 하나 허투루 보지 않았다. 컴퓨터 등 디지털기기에 보관된 서류들에 대한 정밀 수색도 이뤄졌다. 정신없이 압수수색이 진행되는 가운데, 정 씨 부인이 수색을 진행하는 요원의 수를 직접 세어봤다고 한다. 총 21명이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개인의 자택을 이렇게 대규모로 압수수색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면서 “대형 간첩단 사건이나 규모가 큰 기업을 압수수색할 정도는 돼야 이 정도 인력이 동원된다”고 했다.
정 씨는 “처음 들이닥칠 때만 해도 의기양양하던 수사관들의 얼굴에 점점 허탈함이 묻어났다”면서 “구석구석을 압수수색했는데 별 것이 나오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평생 열심히 일한 대가로 돌아온 게 압수수색이어서 상당히 당황스러웠다”면서 “그러나 젊은 수사관들이 고생한다 싶어 등을 토닥여주며 수색에 협조했다. 압수수색 목록에 적힌 물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내가 직접 해줬다”고 했다.
정 씨에 따르면 국정원은 마치 그가 전날 귀국한 것을 기다린 것처럼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국정원이 정 씨 자택에 들이닥친 시점은 귀국한 지 12시간도 되지 않은 시점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압수수색 영장에 명시된 혐의는 다음과 같았다.
“업무상 취급한 군사기밀을 누설하고, 그 대가로 모종의 금전적 이익을 받는 등 군사기밀보호법 상 군사기밀 누설 및 군사기밀 불법거래 혐의가 있다.”
정 씨는 “혐의 내용을 보자니 기가 막혔다”면서 “수사가 시작된 정확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아직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도 국정원 담당 수사관과 검찰은 ‘첩보에 의해서 수사를 하게 됐다’고 반복할 뿐이었다”고 했다.
첩보의 정체는 자필 진술서 2건이었다. 이 중 첫 번째 진술서는 '공무원 이영권'이라는 이가 작성한 문건이었다. 진술서에 따르면 이 씨는 자신을 전직 주중 한국대사관 공관원이라고 소개했다. 2019년 4월 16일 작성된 진술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영권 씨 진술서 내용]이 씨는 진술서와 함께 중국인 재력가 J 명함을 첨부한 것으로 파악됐다. 일요신문은 진술서 내용과 관련한 정 씨 입장을 직접 들어봤다.
주중 한국대사관 육군 무관으로 근무했던 정규필 대령과 중국군 출신 재력가 J(당시 OO생명보험공사 총경리)라는 인물 간의 비위 관련 내용을 2014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득문한 적이 있다. 2014년 6월 업무상 협조관계 및 새로운 업무 여건을 탐색하기 위해 베이징 시내에서 J를 해외동포 소개로 만났다.
J는 자신을 중국군 출신으로 소개하며 북한과 교류 관련 일을 했다고 말했다. 주중 한국대사관 무관 정규필과는 의형제 관계라고 언급했던 기억이 난다. 정규필 대령이 무관이고 J도 중국군 출신인 만큼 한·중 양국군 교류 과정에서 알게 된 사이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정했다.
이후 (J를 소개해준) 해외동포는 2015년 3월경 본인과 업무상 목적으로 만나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던 중 J와 정규필 간 관계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얘기한 후 발설한 사실을 후회하듯 절대로 보안을 지켜달라고 했다.
[해외동포가 언급했던 내용]
J는 중국군 총참모부(중국군 정보기관) 출신이고 주중 한국 무관으로 근무하던 정규필 대령과는 호형호제하는 정도로 친한 관계다.
정규필은 중국에 대한 이해가 깊고 배포도 있는 등 중국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보며, J는 정규필을 인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J는 OOO쇼핑센터와 호텔을 경영하는 OOO그룹 상당지분을 소유한 재력가다. 의형제 관계인 정규필 대령 활동에 필요했던 상당 액수의 비용을 지원해 줬다.
정규필이 과거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대북사업(비선라인)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J의 물질적인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본다.
J로부터 정규필 대령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줬다는 말을 직접 들은 바 있고, 정규필로부터도 J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는 말을 직접 들은 사실이 있다.
정 씨는 “사실과 거짓을 그럴듯하게 섞어 마치 뇌물을 받고 주요 기밀을 팔아먹은 것처럼 묘사가 돼 있었다”면서 “더욱 의문스러운 부분은 이영권이라는 사람의 정체”라고 했다. 그는 “진술서에 언급된 인간관계 관련 정보를 인지하고 있을 만한 인물은 세 손가락 안에 꼽는다”면서 “그 안에 이영권이라는 사람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소문해봤지만 주중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했던 이영권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면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쓴 진술서를 토대로 간첩 수사 대상이 된 상황이 허망할 따름”이라고 했다. 정 씨는 진술서 세부 내용과 관련해 진실과 거짓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이어갔다.
“진술서에 언급된 J와 내가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한 사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경제적인 지원을 받았다고 적힌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진술서에 언급된 해외동포가 누구인지는 짐작이 간다. 그런데 그 해외동포가 사석에서 한 추정을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압수수색을 한 것이 됐다. 심지어 진술서 상엔 경제적 도움과 기밀 누설에 대한 세부적 정황이나 연관관계도 명시돼 있지 않다.”
정 씨의 간첩 혐의 수사 발단이 된 첩보는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전직 기무사(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부사관 출신으로 국방정보본부 담당부서에 근무하던 류 아무개 씨가 2019년 3월 19일 작성한 진술서였다. 정 씨는 류 씨가 실존인물이라고 했다. 류 씨는 진술서에서 정 씨의 대북 정보원 무단 접촉 관련 내용을 지적했다. 류 씨가 언급한 대북 정보원 정체는 북한 정찰총국 소속 허OO, 장OO, 김OO 등 3명이었다.
정 씨는 대북 정보원 무단 접촉 관련 첩보 내용에 대해 “모두 기무사에 정식으로 보고한 사안이었다”면서 “심지어 그 보고는 모두 류 씨를 통해 이뤄졌다”고 했다. 정 씨는 “공식적으로 보고된 사안을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무단 접촉이라고 하면서 간첩 혐의로 묶는 법이 어디 있느냐”면서 “내가 보고하지 않았다면 류 씨가 해당 내용을 어떻게 알고 진술했겠느냐”고 반문했다.
2020년 2월 18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정 씨에 대한 군사기밀보호법 위반(누설) 사건을 증거불충분에 따른 혐의 없음으로 불기소 결정했다. 군사기밀이 저장돼 있는 외장하드를 들고 출국한 것이 북한 정찰총국 관계자에게 기밀을 누설했다고 보기 부족하다는 게 불기소 결정 취지였다. 불기소 결정서에 따르면 ‘유령 진술서’가 지목했던 중국군 출신 재력가에 대한 기밀 누설 혐의는 언급조차 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이렇게 정 씨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런데 불기소처분 결정이 난 다음날인 2월 19일 정 씨에게 등기가 하나 도착했다. 법무부 장관 명의 편지봉투 안엔 출국금지가 연장됐다는 통지서가 들어 있었다. 출국금지를 요청한 건 불기소 처분 결정을 내린 서울중앙지검이었다. 새로운 사건의 시작이었다. 군사기밀 누설이 아닌 군사기밀 소지에 대한 법적 분쟁이 시작된 시점이었다.
지난 7월 10일 정 씨는 Ⅱ·Ⅲ급 비밀 파일 26건을 개인 외장하드로 반출해 소지한 혐의로 1심 재판을 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4단독 김창모 부장판사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정 씨는 1심 재판 결과에 대해 항소를 결정했다. 검찰도 양형이 너무 짧다는 취지로 항소했다.
정 씨 법률대리인 이명현 법무법인 닥터홈 대표변호사는 “문재인 정부 시절 국정원 수사 기능이 사라졌다. 정 씨에 대한 압수수색은 국정원이 수사 기능을 갖고 있던 끝자락에 이뤄진 사건”이라며 “기밀 누설 혐의로 압수수색을 한 뒤 거기서 취득한 외장하드를 포렌식하니 기밀이 나왔다고 그 건을 기소한 것으로 말도 안 되는 별건수사”라고 주장했다.
이 변호사는 “2002년 태극훈련 때 훈련비밀도 이번 재판에서 보유한 기밀로 인정됐다. 훈련은 20년 전에 끝났는데 법원이 여전히 이것을 국가 기밀로 인정한 것인데 이게 비밀이냐”고 반문하며 “수사부터 검찰의 기소, 재판까지 이번 사건은 만들어진 사건 그 자체로 유우성 간첩조작사건과 똑같다”고 덧붙였다.
정규필 씨는 “외장하드 포렌식 과정 중 발견된 기밀 문건 중엔 내가 직접 작성한 보고서도 포함돼 있다”면서 “내가 작성한 뒤 해당 문건이 비밀로 분류됐는데, 삭제 파일 중에서 그게 나왔다고 처벌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했다.
‘유령 진술서’를 근거로 시작된 압수수색이 생각지 못한 사건의 발단이 됐다. 정 씨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37년 군생활이 부정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했다.
대북공작통으로 알려진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에서 국정원·기무사·정보사로 이어지는 대북공작 라인에 대한 숙청이 대대적으로 이뤄졌다”면서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이 국정원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시작된 정 대령 사건은 정보사 대북공작 업무 담당자를 향한 일종의 표적수사인 셈이다. 후임자인 박지원 전 국정원장 시절엔 무혐의가 난 정 씨의 기밀 유출 사건을 초대형 유출 사건인 것처럼 허위보고했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정 대령 사건이 정보사 내에 알려지면서 후배 공작원들은 ‘열심히 일하면 피본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면서 “이런 식으로 간다면 첩보원들이 사무직 공무원처럼 일하는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요신문은 9월 5일 국정원 측에 ‘유령 진술서’ 정체에 관련해 질의했다. 국정원 측은 “(정 씨 사건은) 검찰과 피고인이 쌍방 항소하여 2심 재판 예정인 사안”이라면서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에 의거 재판이 진행 중인 형사 사건의 내용에 대해서는 답변드리기 어렵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