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조문외교 패스하고 미국행, 그날 일정 브리핑 안해…자녀 방문설 관련, 외교부 “일정 빡빡, 그럴 시간 어딨나”
9월 30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단독 처리한 ‘박진 외교부 장관 해임 건의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박진 장관은 “외교는 국익을 지키는 마지노선”이라면서 “엄중한 국제정세 현실 속에서 지금 우리 외교가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국익외교에 매진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순방 정쟁’이 막을 내린 뒤 정치권 안팎에선 박 장관 일정을 둘러싼 각종 의혹이 고개를 들었다. 출발점은 박 장관이 9월 18일과 19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 ‘조문 외교’ 일정을 건너뛰고 미리 미국에 가 있었던 장면이다.
윤 대통령이 순방길에 나설 당시 대통령실은 유엔총회 연설 이후 미국 일정에서 한미정상회담과 한일정상회담 개최가 합의됐다고 밝혔다. 9월 18일 당시 대통령실은 한미정상회담 및 한일정상회담 관련 구체적인 일정은 최종 조율 중이라고 덧붙였다.
정부 내부 사정에 정통한 복수 관계자에 따르면 박 장관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 당시 영국이 아닌 미국에 미리 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박 장관은 인천공항발 뉴욕행 항공편으로 9월 18일(현지시간) 뉴욕에 도착했다고 한다.
해외 주재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관계자들은 이 같은 박 장관 행보에 의구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전직 외교부 관계자는 “박 장관이 미리 미국으로 간 이유 자체는 유엔총회를 비롯한 미국·캐나다 순방 일정을 앞두고 주요 외교 이벤트 일정 및 세부사항을 조율하기 위해서라고도 볼 수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변수가 하나 있었다. 주영 한국 대사가 지난 5월부터 공석이라는 점이었다. 영국은 한국의 주요 외교 파트너 중 하나인 데다, 여왕 장례식이라는 굵직한 외교 일정이 추가된 셈이었다. 주영 한국 대사 공백은 외교부 장관급 인사가 직접 대체할 필요가 있었다. 조문외교 전반에 걸친 사항에 대한 실무적 조율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과 박 장관은 각각 영국과 미국에서 각개전투 식 외교전에 나섰다. 외교가와 정치권에선 박 장관이 미리 미국에 간 목적이 따로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외교부 홈페이지 장관 외교활동 목록에 따르면 윤 대통령이 영국에 도착한 9월 18일 박 장관의 공식 일정 관련 브리핑은 나오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2세 장례식 당일이었던 9월 19일 박 장관은 미국에서 각종 일정에 참석했다. 이날 오전 박 장관은 한·폴란드 외교장관회담, 한·체코 외교장관회담 일정을 소화했다. 오후엔 한·이란 외교장관회담, 한·일 외교장관회담에 참석했다.
9월 19일 오후 윤 대통령은 뉴욕에 도착했다. 9월 20일 윤 대통령은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했고, 9월 21일엔 비속어 논란을 유발한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48초 환담’이 이뤄졌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는 ‘약식 회담’을 통해 만남이 성사됐다.
9월 22일 윤 대통령과 수행단은 미국 뉴욕을 떠나 캐나다 토론토로 이동했다. 토론토 동포 간담회 등 일정을 소화했다. 9월 23일 토론토에서 오타와로 이동한 윤 대통령은 한·캐나다 정상회담을 마친 뒤 귀국길에 올랐다. 런던에서부터 뉴욕, 토론토, 오타와 등으로 연결된 순방 코스에서 박 장관은 런던 일정을 제외하고 나머지 일정에서 윤 대통령을 수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이번 순방 일정이 박 장관 자녀 거주지와 묘하게 겹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면서 “박 장관 딸은 뉴욕에, 아들은 토론토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까닭”이라고 주장했다.
박 장관 자녀들은 인사청문회 당시 거론된 적이 있다. 박 장관 딸은 한미경제연구소(KEI) 특혜채용 의혹 중심에 섰다. 박 장관은 인사청문회 당시 딸 특혜채용 의혹과 관련해 “내부 기준과 절차에 따라 채용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박 장관 아들은 캐나다에 주소지를 둔 온라인 도박 사이트 운영 해외그룹사 임원으로 근무한 사실이 드러나며 논란에 휩싸였다. 박 장관 아들이 근무하고 있는 회사가 조세회피 목적으로 페이퍼컴퍼니를 네덜란드령 퀴라소에 두고 있는 부분에 대한 의혹도 제기됐다.
인사청문회 현장에선 김경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박 장관 아들 관련 논란을 겨냥해 “현금을 걸고 포커를 치면 도박이냐 게임이냐”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박 장관은 질문과 관련해 “넓게 보면 게임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해 또 다른 논란을 낳기도 했다.
박 장관 자녀들이 각각 뉴욕과 토론토에 거주하고 있는지에 대해 외교부 측은 “장관님 개인적인 부분과 관련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박 장관이 ‘조문 외교’에 참석하지 않고 미국으로 먼저 가 있던 이유와 관련해 외교부 측은 “유엔총회의 경우 각국 지도자들이 모이지만, 외교장관들이 오는 경우 역시 많아서 장관 양자회담을 굉장히 많이 한다”고 설명했다.
가족 등 친지를 만나러 미리 미국을 방문한 것 아니냐는 의혹과 관련해 외교부 측은 “외교부 장관이 가족 등 친지를 만나러 미국을 방문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은 사실과 다르다”면서 “장관님 일정이 굉장히 빡빡하고 바빠 그럴 시간이 없다. 이번 순방 일정은 장관 단독 일정이 아니라 대통령 수행 일정이기 때문에 일정이 더 빠듯하다”고 말했다.
외교부는 “박진 장관은 순방 일정 준비에 철저를 기하고 여러 파트너국과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뉴욕을 미리 방문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박 장관은 대통령의 영국, 미국, 캐나다 방문 일정 관련 사항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출장단 본대에 앞선 9월 18일 뉴욕에 도착해 일정을 진행하기로 결정했으며, 대통령 영국 방문 일정 실무 준비를 위한 조치도 미리 취한 바 있다. 출장 일정 검토 과정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엔 정상 내외만 참석할 수 있다는 부분과 당초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가 9월 19일 예정된 부분을 감안한 결정이었다. 대통령 영국 방문 관련해선 실무를 총괄할 수 있도록 전 주영 대사인 현직 차관급 간부를 사전에 파견해 정상 행사를 현지에서 지원토록 했다.”
이어 외교부는 “박 장관은 9월 18일 뉴욕 도착 이후 주유엔대표부 대사, 차석대사 등과 유엔대사 관저에서 사전 업무협의를 갖고 오후엔 숙소에 머물면서 유엔 행사 준비 관련 내부 회의를 주재했으며, 저녁엔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주재하고 빌 게이츠 등 다수 유력 인사들이 참석하는 글로벌펀드 만찬에 참석했다”고 했다.
외교부는 “9월 19일 예정돼 있던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다수 정상이 영국 국장에 참여하기로 하면서 일정이 9월 21일로 변경됐다”면서 “박 장관은 일정 변경 변수를 활용해 일본을 비롯해 필리핀, 체코, 폴란드, 이란 등 외교장관 회담을 가지며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고 덧붙였다.
외교부 홈페이지 장관 외교활동 목록에 일정 상세사항이 비어있는 점과 관련해 외교부는 “외교부 장관이 대통령 순방 수행 일정을 진행하는 경우엔 통상적으로 이러한 내용을 외교부 홈페이지 장관 외교활동 목록에 상세히 등재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