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이럴 일이야?” 어설픈 해명이 되레 판 키워, 국감 파행 우려도…대통령실 ‘정면돌파’ 의지
윤석열 대통령이 ‘순방의 늪’에 빠졌다. 5박 7일 일정으로 소화한 해외 순방 이후 남은 것은 유엔총회 연설도 정상외교·조문외교 후일담도 아니었다. 9월 22일 오전 6시 10분경(한국시간) 윤 대통령이 박진 외교부 장관에게 건넨 말 한마디가 정치권에 강력한 후폭풍을 일으켰다.
논란의 말 한마디가 담긴 영상은 이날 오전 10시 7분 MBC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MBC 뉴스’를 통해 공개됐다. 영상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글로벌펀드 재정회의에 참석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48초 환담을 마친 뒤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행사장을 나서며 윤 대통령은 박진 외교부 장관 옆에서 말 한마디를 꺼냈다. MBC 뉴스데스크가 보도한 영상 자막에 따른 윤 대통령 발언은 이랬다.
“(미국)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
국회가 한국 국회와 미국 의회 중 어떤 곳을 지칭하는지 여부와 바이든 대통령 이름이 언급됐는지 여부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9월 22일 오후 10시 25분경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순방 취재진들을 만나 “순방외교는 국익을 위해 상대국과 총칼 없는 전쟁을 치르는 곳”이라면서 “한발 더 내딛기도 전에 짜깁기와 왜곡이 발목을 잡는다”고 했다. 김은혜 수석 해명에 따르면 윤 대통령 발언 내용은 이랬다.
“국회에서 이 XX들이 (오늘 글로벌펀드 재정회의에서 약속한 공여금을) 승인 안 해주면, (예산안을) 날리면 쪽팔려서 어떡하나?”
정치권에서 윤석열 대통령 비속어 논란을 둘러싼 진실게임 막이 올랐다. 대통령실이 해당 발언 내용 관련 비보도 요청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MBC가 영상을 유튜브에 게시하기 전 ‘막말외교 사건’을 언급한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야권에서 미리 영상을 받아본 것 아니냐는 ‘정언유착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야권 관계자는 “사실 이슈가 불거질 초반만 해도 윤 대통령에게 작은 유효타를 날릴 수준 정도의 단순한 해프닝으로 마무리될 것이라고 봤다”면서 “그런데 대통령실에서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해명하면서 판이 되레 커진 것 같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실 해명 이후 여야는 각자 다른 입장을 취하면서 진실게임을 이어갔다. 대통령 말 한마디를 둘러싼 다른 해석은 극한으로 치닫는 형국이다.
‘MBC 편파·조작 방송 진상규명 TF’를 출범한 국민의힘은 이번 논란을 ‘MBC 자막조작사건’으로 규정했다. 진상규명 TF를 비롯한 국민의힘 의원들은 9월 28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소재 MBC 본사를 항의방문했다. 9월 29일 국민의힘은 대검찰청에 MBC 사장과 보도국장에 대한 고발장을 제출했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MBC 본사를 항의방문한 자리에서 “MBC는 공영방송이 아닌 민주당 전위부대”라면서 “국익을 해치는 선동과 조작을 한 MBC가 어떻게 공영방송이 될 수 있느냐. 이제 민영화를 통해 MBC를 우리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논란을 ‘외교 참사’로 규정했다. 외교 참사 책임자로 박진 외교부 장관을 지목했다. 9월 29일 더불어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박진 외교부 장관 해임 건의안을 단독 표결 처리했다. 국민의힘은 표결에 불참했다. 정의당 역시 ‘외교 참사에 따른 대통령 사과가 먼저’라는 입장을 취하며 표결에 불참했다. 투표 결과는 재석 의원 170명 가운데 찬성 168명, 반대 1명, 기권 1명이었다.
오영환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윤 대통령을 향해 “대통령의 욕설만 남은 외교참사를 막지 못한 것도, 대통령이 빈손으로 돌아오도록 한 무능도 모두 박진 장관과 외교라인 책임”이라면서 “박진 장관 해임건의안을 수용하고 대통령실 외교라인도 즉각 쇄신하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국민의힘은 박진 해임 건의안이 단독 처리된 것과 관련해 맞불을 놨다. 김진표 국회의장 사퇴 권고안을 제출했다. 윤 대통령 비속어 논란을 둘러싼 진실게임 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모양새다. 정치권 안팎에선 여야의 극한 대치가 10월 4일 예정된 국정감사 파행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한 여권 관계자는 “이번 국정감사는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 등 안보 이슈와 태양광 카르텔 등 재생에너지 관련 비리 등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이뤄져야 할 무대”라면서 “정권교체 이후 첫 국정감사 핵심 이슈로 대통령 비속어 논란이 떠오르게 생겼다”고 했다. 관계자는 “비속어 논란 때문에 국정감사를 앞두고 국회가 멈춰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윤 대통령 발언 속 단어가 바이든인지 날리면인지를 파악하는 문제가 박진 장관과 MBC 둘 중 누구를 날릴지 문제로 비화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당직자 출신 여권 관계자는 “윤석열 대통령과 대통령실이 이번 논란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한 부분도 아쉬운 대목”이라면서 “사과는 하지 않더라도, 논란을 앞장서 키울 이유까지는 없었는데 작은 이슈가 정국을 뒤덮는 초대형 이슈로 불어난 상황이 안타깝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통령실이 마치 비속어 논란 진실규명에 명운을 건 것처럼 극단적인 배수진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덧붙였다.
야권 관계자는 “대통령이 사과 한번 하면 끝날 이슈가 길게 늘어지며 국민적 피로감이 커지고 있다”면서 “어느 때보다 민생이 어려운 상황에서 정치권이 대통령 말 한마디를 가지고 정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실은 비속어 논란과 관련해 정면돌파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윤 대통령은 9월 26일 귀국 이후 첫 도어스테핑(출근길 약식 기자회견)을 통해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하는 것은 국민을 위험에 빠뜨린다”면서 “진상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더 확실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9월 29일 도어스테핑에선 박진 장관 해임건의안 거부권 행사를 시사했다. 이날 윤 대통령은 “박 장관은 탁월한 능력을 가졌고, 건강이 걱정될 정도로 국익을 위해 전세계로 동분서주하는 분”이라면서 “어떤 게 옳고 그른지 국민들께서 분명히 아실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9월 29일 김대기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윤 대통령 비속어 논란 관련 MBC 보도를 가짜뉴스로 규정했다. 기자회견에서 김 비서실장은 “MBC 쪽은 입장 발표가 전혀 없다”면서 “(논란을) 빨리 종식시키고 싶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 언급했다. 이날 대통령실은 모든 것이 불분명해 유감 표명을 하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여권 일각에선 MBC의 항복을 받아내기 전까지 이번 논란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존재한다. 그 가운데 국민의힘 내부를 비롯한 정치권 안팎에선 대통령 비속어 논란에 피로도를 느끼는 기류도 감지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의 강경한 정면돌파 의지와 관련한 회의론도 일각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9월 24일 홍준표 대구시장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뒤늦게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수습해야지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하면 거짓이 거짓을 낳고 일은 점점 커진다”면서 “무슨 큰 국가적 난제로 논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프닝과 가십만 온통 나라를 뒤덮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9월 29일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은 경북대 특강에서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온 국민이 지금 듣기평가를 하는 상황”이라면서 “대통령실이나 우리 당이나 국민을 개돼지로 취급하는 코미디 같은 일을 당장 중단하고 깨끗하게 사과하고 지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 전 의원은 “이런 문제로 이 중요한 임기 초반에 시간을 허비하는 게 너무나 답답하다”고 했다.
정치평론가 신율 명지대 교수는 윤 대통령 비속어 논란 관련 일련의 과정과 관련해 “대통령실과 여당인 국민의힘이 대응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신 교수는 “특히 국민의힘이 MBC를 고발하는 상황은 향후 외통수에 몰릴 수 있다”면서 “보도 내용이 문제인지 보도 자체가 문제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구분을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신 교수는 “보도 자체를 가지고 문제를 제기한다면 언론 탄압 프레임에 빠질 수 있고, 보도 내용을 가지고 대치한다면 이게 법적 고발까지 갈 일인가 하는 부분에서 약점이 생길 수 있다”면서 “비속어 논란으로 국정감사 파행 가능성까지 언급되는 현 상황이 바람직해보이진 않는다”고 분석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