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 애도 물결 속 상가도 추모 휴업…주민들 트라우마, 행정 당국 책임론 두고 의견 분분
“제가 그 현장에 있었어요. 10분만 늦었어도 안에서 죽었을 겁니다. 살려 달라고 소리치던 그 사람들이 잊히지 않아요.”
사건 당일 현장에 있었던 한 30대 남성이 인터뷰 내내 떨린 목소리로 눈물을 보이면서 전했던 말이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173-7. 현장 곳곳엔 아비규환의 흔적이 여과 없이 남아 있었다. 핼러윈 코스튬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띠, 찌그러진 맥주캔, 숙취해소제 등이 거리에 널브러져 있었다. 쓰레기더미 가운데엔 누군가 놓고 간 국화 꽃다발 5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10월 31일 새벽까지 국내 언론은 물론 일본 후지TV, 폴란드 공영방송 TVP 등 주요 외신의 보도 열기는 계속됐다.
골목길을 비추는 주황 가로등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현장은 해밀톤 호텔 서쪽 인근에 있는 길이 45m, 너비 4m의 좁은 내리막길. 대로변에 가까워질수록 도로가 좁아지는 이른바 병목 구조다.
폴리스라인 너머로 보이는 현장 오른쪽에는 폭 70cm의 분홍색 철제 가벽이 눈에 띄었다. 불법 증축물 논란이 일고 있는 곳이다. 이 가벽으로 인해 성인 4~5명만 나란히 서도 꽉 찰 것처럼 보였다. 현행법상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도로 폭은 4m 이상이어야 한다. 철제 가벽으로 도로가 3.2m로 좁아지면서 대참사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해밀톤 호텔 동쪽 방향 입구 역시 출입이 불가했다. 해밀톤 호텔 기준으로 뒤쪽 세계음식거리와 대로변으로 연결되는 다른 골목이다. 압사 사고가 일어났던 날 서편 골목길에 서 있던 인파가 내리막 방향으로 넘어지면서 도미노처럼 깔렸는데, 동쪽 골목 통제가 불가능해지면서 사고가 더 커졌다.
이태원 일대는 경찰이 현장보존을 위해 폴리스라인을 쳤고, 차량 출입이 통제됐다. 현장에 투입된 경찰만 30명은 넘어보였다. 이태원 상인들이 추모를 위한 휴업에 나서면서 분위기는 더욱 스산했다. 참사가 발생한 바로 맞은편, 터키인이 운영하는 한 케밥 집만 유일하게 영업 중이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1월 5일 애도기간까지 휴점합니다”라는 이태원관광특구연합회의 안내문이 여러 상점 앞에 내걸어져 있었다.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마련된 임시 추모 공간 앞에서는 새벽 늦게까지 애도 물결이 이어졌다. 헌화할 수 있는 국화꽃이 마련되면서, 시민들은 손에 국화 한 송이를 쥐고 있었다. 국화꽃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소주, 와인, 과자, 담배 등이 보였다. 일대에는 이따금씩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길에 소주를 뿌리며 추모하다 통곡하는 시민, 멍하니 쪼그려 앉아 있는 시민 등 다들 깊은 슬픔에 잠긴 모습이었다.
지하철 난간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수십 장의 포스트잇이 붙어져 있었다. “너와 갑자기 이렇게 헤어지게 될 줄 몰랐지만, 아직 너가 내 곁에 없다는 게 실감이 안 나. 항상 울기만 했던 너에게 웃음을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가버리는 게 어딨어. 너의 마지막 연애를 함께해서 행복했다”라는 글도 그 중 하나였다.
현장에선 사고 당일 이태원을 찾았던 청년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당시 극심한 교통 혼잡으로 소방차 진입이 쉽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30대 남성 A 씨는 “한남동에 주차를 하고 걸어 올라오고 있었는데, 그때 막 소방차가 보였다. 차가 너무 많이 막혀서 소방관 구조대원들이 차를 버리고, 장비를 들고 뛰어가는 장면을 봤다. 그때까지는 사태가 이렇게 심각한지 몰랐다”며 울먹거렸다
A 씨는 “11시 20분쯤 디제잉 노래가 꺼졌고, 지인에게 인파에 있었다가 건물 안에 들어와서 겨우 살았다는 전화를 받았다. 11시 30분쯤 사고 난 곳에 사람들이 누워있었다. 가망이 없다는 의학적인 표시(N)가 돼 있는 사람들이 누워있는 걸 봤다”고 상황을 전했다.
30대 초반 남성 B 씨는 “녹사평역에서 걸어오다가 현장을 발견했다. 11시 30분쯤이었고,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고 응급차도 계속 왔다. 무서워서 지하철을 타고 그냥 갔는데, 기억이 생생하다. 죄책감이 든다”며 눈물을 보였다.
31일 오전 12시 45분경 국화꽃 154송이가 들어 있는 바구니를 들고 온 30대 중반 여성 C 씨를 현장에서 만났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4명(11월 1일 오전 11시 기준 156명)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C 씨는 기자에게 “부디 유족들을 위한 국민들의 공감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정치적으로 변질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꽃바구니엔 “그때 나이에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려 이 거리에 온 순수하고 열정 넘치는 젊은이들에게 닥친 불의의 사고에 마음이 미어진다”며 “더 이상의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하여 딱 154송이의 국화꽃을 헌화한다.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찢어질 듯 마음 아픈 유가족 분들께서도 슬픔을 잘 이겨내고 일상으로 돌아가실 수 있길 마음 가득 기원한다”고 쓰여 있었다.
이태원 일대에선 참사 책임론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이태원에서 40년간 거주했다고 밝힌 한 남성은 “우리 아들딸이 모두 현장에 있었고, 지켜봤다. 교통 통제만 했어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행정당국이 잘못했다”고 분노했다.
이태원관광특구연합회 소속이라는 한 남성은 “유관 기관이 모두 모여서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사 아닌가. 우리로서는 많은 사람들이 몰릴 걸 예상을 하고, 경찰서장까지 나와서 같이 순찰을 돌았다. 밤 10시 15분쯤 (대열이) 무너졌는데, 통로가 다 막히면서 뒤로 (사람들을) 빼라고 해도, 시민들이 협조를 하지 않았던 게 안타깝다”고 현장 상황을 알렸다. 이어지는 중년 남성의 말이다.
“무너졌던 곳은 생각도 못했던 장소다. 무너진 후로 30분이 지나서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맨 앞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아무리 잡아당겨도 안 나온다. 200~300명이 앞에서 살려달라고 그러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뒤에서부터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다 지켜봤는데, 그 모습이 아직까지 선하다.”
설상미 기자 sangm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