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에 기재부까지 개입 미숙한 판단 정황…4대 금융지주 ‘불똥’ 자본조달 더 힘들어져
#조기상환권…겉으론 ‘선택’ 실제론 ‘의무’
금융회사들은 법령 등에 의해 일정 비율 이상의 자본을 유지해야 한다. 고객들이 맡긴 돈을 계약에 따라 제대로 지급하기 위해 일정 비율 이상 자기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회사의 고유 자산은 자본이다. 보통 자본은 주식 발행해서 조달한다. 하지만 주식을 더 발행하면 기존 주주들의 지분율이 낮아진다. 기존 주주가 지분율을 유지하려면 돈을 투자해서 신주를 사야 한다.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지분율 유지가 중요한 대주주에게는 부담이다. 이 때문에 굳이 주식을 발행하지 않더라도 자본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 고안됐다. 아주 오랫동안 갚지 않는 조건으로 빌리는 돈이다. 신종자본증권이다. 만기가 30년 이상이어서 영구채로도 불린다. 하지만 정말 만기가 그렇게 긴 것은 아니다.
돈을 빌려주는 입장에서는 만기가 길수록 회수 위험이 커진다. 이를 관리하려면 이자를 아주 높게 붙이거나 만기를 줄여야 한다. 그래서 등장한 게 돈을 빌리는 이에게 조기상환 권리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표면적으로는 30년 이상 돈을 빌려주는 형식이지만 5년 뒤에 미리 갚을 수도 있도록 한 장치다.
그러면 5년 뒤에 ‘반드시 갚도록’ 한 것이 아니라 ‘갚을 수도 있도록’ 한 이유는 뭘까. 5년 뒤에 반드시 갚도록 조건을 달면 5년 만기 채권이 되어 버린다. 5년 뒤에 갚을 조건으로 빌린 돈을 자본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하지만 5년마다 갚는 것이 사실상 시장의 암묵적 약속이 됐다. 5년마다 갚을 수 있을 정도로 회사가 튼튼하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는 셈이다. 최근 자금시장이 어려운 상황에서 조기상환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은 투자자 불안을 부추기기에 충분한 재료가 된다.
#정부가 막았나…레고랜드 닮은꼴
특히 대한민국 정부가 이번 사태의 배경에 있을 정황이 드러난 점에서 시장 우려는 상당했다. 10월 초 발생한 레고랜드 사태도 지방정부인 강원도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서 일파만파로 확대됐다.
현행 감독규정상 은행과 보험사는 신종자본증권 등의 발행은 물론 조기상환 결정에 앞서 금융감독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번 흥국·DB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권 미행사도 사전에 금감원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는 금감원이 지난 11월 2일 흥국생명의 조기상환권 미행사에 금융시장이 불안한 반응을 보이자 보도자료를 내며 해명한 데서도 확인된다. 금감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금융위, 기재부, 금감원 등은 관련한 일정, 계획 등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며 지속적으로 소통해 왔다”고 밝혔다.
금융회사는 금융위와 금감원 관할이다. 그런데 자료에는 기획재정부까지 포함됐다.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이 달러로 빌린 외화채권이기 때문이다. 무려 5억 달러나 되는 외화 빚을 갚을지 여부가 달린 사안이어서 기재부까지 개입한 것이다.
자금시장이 어렵지만 흥국생명 대주주인 태광그룹은 소문난 현금부자다. 발행 때부터 조기상환을 준비했을 가능성이 크다. 금감원도 흥국생명의 사정이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럼에도 굳이 조기상환을 하지 않았다면 승인권을 가진 정부가 막았다는 뜻이 된다. 최근 환율이 크게 오른 상황에서 정부로서는 외화 유출을 최소화할 필요가 컸을 수도 있다.
뒤늦게 흥국생명이 조기상환권을 행사하기로 한 것은 금감원의 승인을 얻었다는 뜻이다. 은행들이 나서 4000억 원을 빌려주기로 한 것도 당국의 결정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년에 조기상환 시기가 돌아오는 신종자본증권이 상당하다. 매번 조기상환권 행사 여부를 두고 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엄청난 기회비용
생명보험업계에서 중소형사에 불과한 흥국생명과 DB생명의 현안이지만 금융시장이 크게 요동쳤다. 시장이 대한민국의 외환 및 자금사정이 어렵다 증거로 받아들이면서다. 신종자본증권으로 자본을 많이 늘려온 금융지주회사들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이번 사태 발발 직후인 지난 11월 4일 기준 국내 4대 금융지주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 평균은 75bp(100bp=1%포인트)로 전년 말(22bp) 대비 3배 이상 뛰었다. CDS 프리미엄은 빌린 돈을 갚지 못할 것에 대비해 내는 일종의 보험료다. 이 수치가 높을수록 부도 위험을 크게 본다는 뜻이다. 수치가 높을수록 외화를 빌릴 때 내야 하는 이자율도 올라간다. 결국 금융지주와 계열 은행들도 이번 사태로 더 많은 비용을 내야 자본을 조달할 수 있게 됐다.
기존에 발행된 신종자본증권 가격에도 악영향이다. 조기상환 위험이 부각되면서 유통 가격이 하락해서다. 채권도 주식처럼 시장에 내다팔 수 있다. 하지만 발행금리는 제때 조기상환이 되는 것을 전제로 설정됐다. 조기상환이 되지 않는다면 만기까지 보유해야 손실 없이 원리금을 회수할 수 있다. 신종자본증권은 주로 기관투자자들이 매수했지만, 증권사들의 경우 매수한 물량을 일반 고객들에게 재매각하기도 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