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질타도 받았지만 월드컵서 가치 증명…양측 수비 김진수·김문환도 승점 획득에 기여
중원 싸움에서 우위를 가져간 것이 주효했던 경기였다. 우루과이 디에고 알론소 감독은 미드필드를 로드리고 벤탕쿠르(토트넘 홋스퍼), 마티아스 베시노(라치오), 페데리코 발베르데(레알 마드리드) 3인으로 구성했다. 성장세를 보이는 이들이었고 이번 시즌 유럽에서의 활약상 또한 좋았던 선수들이었다. 최초 우루과이가 월드컵 조별리그 상대로 결정될 당시보다도 좋은 흐름을 타고 있었다. 자연스레 '월드클래스' 공격수였던 루이스 수아레즈(나시오날)보다도 경계 대상으로 꼽혔다.
이처럼 세계적인 선수들을 상대로도 국내 미드필더 자원들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단단한 수비를 구축하는 동시에 때때로 찬스를 만들었다. 경합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맞서며 점유율을 높였다. 열세가 예상되던 경기를 오히려 '승리하지 못해 아쉽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이끌어 간 데에는 정우영, 황인범이 자리한 미드필드 후방에서의 공헌이 컸다.
정우영과 황인범은 파울루 벤투 감독이 부임한 이래 4년간 꾸준히 대표팀 한 축을 지켜온 자원들이다. 때론 축구계 내외 질타를 받기도 했지만 벤투 감독은 뚝심으로 이들에게 신뢰를 보냈다. 4년간 연마를 이어온 이들 중원 조합은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의 결실을 눈앞에 두고 있다.
#가는 곳마다 핵심…'대전의 아들' 황인범
대한민국 대표팀으로 다년간 활약하며 유럽까지 진출한 황인범은 일찍이 대전 지역에서는 더욱 유명한 스타였다. 대전에서 학창시절 12년을 보냈고 졸업 직후엔 지역 프로 구단인 대전 시티즌(현 대전 하나시티즌)에 입단해 활약했다.
학창 시절부터 또래 중 가장 공을 잘 차는 선수로 명성을 떨쳤다. 1996년생 황인범은 그 위아래 2~3년 차이의 선수들 사이 가장 유명한 선수였다.
황인범을 대전문화초에서 지도한 박성만 감독은 "아주 어릴 때부터 공차는 것을 좋아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본인이 축구를 하고 싶은 의지가 커서 축구부에 들어왔다. 남다른 재능을 보여 2학년 때부터 5, 6학년 선수들이 뛰는 경기에 투입시켰다"고 설명했다. 황인범은 해외 활동 중에도 틈이 나면 박 감독을 찾는 것을 잊지 않는다. 때론 박 감독의 현 제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해주기도 한다.
박 감독은 황인범을 '스펀지 같은 선수'로 기억했다.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선수였다. 한 가지를 지시하면 의도를 파악하고 곧장 이행했고 부족하면 연습도 충실하게 했다. 머리도 좋은 선수였다. 교과 성적도 좋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학창시절 황인범에게 아쉬운 점은 체격이었다. 박 감독은 "지금도 크진 않지만 학생 때는 더 작았다. 그래서 빠른 패스와 양발 사용을 요구했는데 언제나처럼 잘 따라줬다"며 "인범이가 잘 받아들이는 유형이기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제자의 월드컵 데뷔전을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본 박 감독의 소감은 "못했다"였다. 아끼는 제자를 향한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그는 "수비를 완전히 뚫는 킬패스 같은 장면은 잘 나오지 않았다. 황인범은 더 잘할 수 있는 선수다. 더 날카로운 패스로 많은 찬스를 만들어 줘야한다. 2차전부터는 잘할 수 있으리라 본다"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황인범은 벤투 체제에서 '황태자'로 불릴 만큼 대표팀 커리어의 전체를 보냈다. A대표 발탁 역시 벤투 감독 부임 이후였다. 지난 4년간 벤투 감독의 꾸준한 신뢰를 받아왔다.
대표팀 내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것과 달리 프로 커리어에서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많았다. A대표팀 데뷔 이후 첫 해외진출 행선지는 캐나다 밴쿠버였다. 약 1년 반 동안 팀의 핵심으로 활약한 황인범은 유럽에서 도전을 이어갔다. 그의 첫 유럽 구단은 러시아의 루빈 카잔.
예상치 못한 변수가 이어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리그가 중단된 것이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러시아 리그 소속 선수들에게 특별 규정을 도입했고 황인범은 임시 FA 자격을 얻어 K리그 FC 서울과 단기 계약을 맺기도 했다. 이후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된 황인범은 그리스 명문 올림피아코스 유니폼을 입었다.
A대표 데뷔 이후 지난 4년간 황인범은 6개 구단에서 활약했다. 적응기간이 필요할 법 했지만 그는 자신이 소속됐던 모든 구단에서 핵심 자원으로 활약했다.
#정우영, 벤투 감독의 신뢰에 보답
언제나 대표팀 미드필드 한 자리를 차지하는 정우영은 벤투 감독이 가장 신뢰하는 자원이다. 벤투 감독이 대한민국 지휘봉을 잡고 치른 54경기 중 정우영은 35경기에 나섰다. 또 다른 핵심 자원인 공격수 손흥민, 골키퍼 김승규와 같은 수치며 그보다 앞선 이는 중앙 수비 조합인 김영권(41경기), 김민재(38경기)뿐이다.
특히 벤투 감독은 친선전이 아닌 타이틀이 걸린 경기에서는 정우영을 더욱 중용했다. 2019 아시안컵, 월드컵 예선 등의 경기에서 코로나19 감염으로 빠진 기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경기에 선발 풀타임을 소화했다. 그가 벤치에 앉은 경기는 2차 예선 당시 최약체였던 스리랑카전뿐이었다.
이처럼 벤투 감독이 깊은 신뢰를 보내는 정우영이지만 그의 대표팀 커리어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는 2012 런던 올림픽 멤버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대회 중 중용되던 멤버는 아니었다. 당시 동료들이 대거 A대표팀에도 곧장 이름을 올렸던 것과 달리 그의 A대표팀 데뷔는 비교적 늦게 성사(2015년 6월)됐다.
이후로도 팬들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던 정우영이다. 2017년 한일전 4-1 대승, 2018 러시아 월드컵 독일전 승리, 2022 카타르 월드컵 본선 조기 진출 등 주요 성과마다 힘을 보탰지만 대표팀의 경기력이 흔들릴 때면 정우영을 향한 원성이 이어졌다.
같은 포지션의 다른 선수들과의 비교도 잦았다. 정우영 이전 대표팀 미드필드 후방을 지키던 이는 기성용이었다. 유럽 무대 중심에서 활약하던 기성용과의 비교를 피하기 힘들었지만 정우영은 묵묵히 대표팀을 지켰다.
이상윤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현재 정우영은 대표팀에서 대체가 안 되는 자원이다. 가진 능력이 출중한 선수"라며 "질타를 받을 때는 선배로서 마음이 아팠는데 이번 대회 진가를 보이는 것 같아 뿌듯하다"는 말을 남겼다.
정우영은 그라운드 위에서 한 명의 선수로 기능할 뿐 아니라 선수단 내 리더 역할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축구계 인사는 "정우영은 팀 내 최고참급 선수다. 현재 대표팀 주장은 손흥민이지만 정우영 또한 후배들을 이끄는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며 "다른 선수들도 정우영을 잘 따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벤투 감독과 정우영 사이 신뢰도 단단하다고 들었다"고 귀띔했다.
정우영은 지난해 10월 대표팀과 팬들에 대한 '소신 발언'으로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는 당시 월드컵 예선 일정 이후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축구는 한 명이 잘해서 이기고 지는 스포츠가 아니다"라며 "결과에 대해 특정선수를 지목해 비난과 욕설하는 행동을 멈춰 달라. 정당한 비판은 언제든 선수들도 받아들인다. 뜨거운 응원 감사하다"는 말을 남겼다. 축구계에선 '과도한 비판을 조금이나마 잠재우고 내부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상처 치유한 김진수…기대감 채운 김문환
난적 우루과이를 상대로 승점을 획득한 데에는 김진수, 김문환이 활약한 양측 측면 수비의 활약도 있었다. 김진수는 월드컵에 대한 자신의 상처를 잊게 하는 활약이기도 했다.
김진수는 어린 나이였던 2013년부터 자원이 부족한 좌측면 수비수 포지션에서 대표팀의 핵심적인 수비수로 활약해왔다. 부임하는 감독마다 그를 중요한 자원으로 낙점, 중용했다.
하지만 유독 불운한 커리어를 걸어온 김진수다. 월드컵을 앞두고 찾아오는 부상에 10년 가까운 대표팀 경력에도 그간 월드컵 출전 횟수는 0회였다. 앞서 두 번의 월드컵 모두 개막을 눈앞에 두고 부상을 당해 엔트리에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도 노심초사했다. 리그에서의 강행군으로 허벅지 상태가 좋지 않았다. 월드컵을 위해 소집된 대표팀에서도 팀훈련을 소화하지 못할 정도였으나 꾸준한 회복 훈련으로 첫 경기에 나서 귀중한 무승부에 기여했다.
김진수 반대편의 김문환에게도 박수가 쏟아졌다. 조직력 다지기에 열중해 온 벤투호에서 가장 불확실한 포지션 중 하나가 우측면 수비였다. 통상 포지션 당 두 명을 선발하는 엔트리에서도 오른쪽 측면 수비수는 김문환을 포함해 김태환과 윤종규까지 3명이 선발됐다. 벤투 감독은 마지막 평가전까지 이 자리에 선수들을 고루 기용하며 고민하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결국 월드컵 본선 첫 경기에서 낙점을 받은 이는 김문환이었다. 포지션상 우루과이의 거구 공격수 다윈 누녜스(리버풀, 187cm 87kg)와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15cm의 가까운 신장 차, 20kg에 가까운 몸무게 차이를 극복하며 버텨내 무실점 경기에 기여했다.
측면 공격수 출신답게 적극적인 공격 가담으로도 힘을 보탰다. 전반 32분 이날 경기의 가장 좋은 찬스를 만들어낸 주인공이 김문환이었다. 김문환은 이날 출전 선수 중 축구 통계 사이트에서 발표한 가장 높은 0.12의 '어시스트 기대치(Expected assists)'를 기록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