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보도 후 전담팀 편성, 호주 경찰과 합동 작전…“FBI도 못 잡을걸?” 뽐내기 흔적, 범행 결정적 증거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취재해 디지털 성착취 범죄를 공론화하고 조주빈·문형욱 등의 검거를 이끌어 낸 추적단불꽃의 ‘단’ 원은지 씨는 현재 미디어플랫폼 alookso(얼룩소)에서 에디터로 활동 중이다. 원 씨는 피해자 메일을 받은 2022년 초 바로 경찰에 신고하고 엘에 대한 본격적인 취재에 돌입했다. 8월에는 KBS와 함께 엘의 실체를 단독 보도했다.
엘의 실체가 세상에 공개되자 서울경찰청은 전담수사팀을 편성해 수사에 속도를 붙였다. 그렇게 원은지 에디터가 엘에 대한 취재를 시작한 지 11개월, 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지 3개월 만인 11월 24일, 드디어 엘이 검거됐다.
#혐의 부인한 A 씨, 휴대전화 속 증거로 체포
11월 24일 서울경찰청은 2020년 12월부터 2022년 8월 15일까지 아동·청소년 9명을 협박해 알몸이나 성착취 장면을 촬영해 아동청소년성착취물을 제작·유포한 ‘제2의 n번방 사건’(일명 ‘엘’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A 씨를 호주 경찰과 현지 합동수사를 통해 검거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A 씨의 신원을 특정한 뒤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인터폴 적색수배를 했고, 호주 경찰과 합동으로 ‘인버록’ 작전에 돌입해 11월 23일 오전 시드니 교외에 있는 A 씨의 주거지 등을 압수수색한 뒤 A 씨를 체포했다. 경찰은 한국 국적인 A 씨가 2010년부터 호주에 살았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번 인버록 작전은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 수사관과 호주 연방경찰(AFP) 아동보호팀(Child Protection Operations Team)이 함께 진행했다. 참고로 ‘인버록’은 호주 경찰이 부여한 합동 작전명이다. A 씨의 도주 및 증거 인멸을 우려해 극비리에 진행된 인버록 작전은 행여 A 씨가 몰래 숨겨 놓은 다른 전자기기가 존재할 가능성을 고려해 탐지견까지 동원됐을 만큼 철저하게 진행됐다.
한국과 호주 경찰 합동 작전으로 검거된 A 씨는 자신은 ‘엘’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압수수색 과정에서 발견된 영상들은 “인터넷에서 받은 것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압수수색 과정에서 경찰이 확보한 A 씨의 휴대전화 2대 중 1대에서 발견된 영상들 가운데에는 언론 등을 통해 존재가 알려지거나 인터넷에 유포되지 않은 영상들이 포함돼 있었다. 또한 휴대전화에서 A 씨가 피해자와 연락했던 텔레그램 계정까지 확인됐다. 이는 강하게 범행을 부인하던 A 씨가 ‘엘’이라는 결정적 증거였고, 결국 A 씨는 현장에서 바로 체포됐다.
#자신만만하던 '엘', 언론 보도 후 자취 감췄지만…
서울경찰청은 “엘의 범죄와 관련해 해외 기업에 대해 140차례에 이르는 압수수색영장을 집행해 필요 자료 확보에 돌입해 IP(인터넷 접속) 주소 등을 통해 A 씨의 신원을 특정했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추적 과정은 엘을 처음부터 추적해온 원은지 에디터가 미디어플랫폼 얼룩소에 올린 글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원 에디터가 얼룩소에 올린 ‘엘 검거에 부쳐’라는 연재 글에서 엘에 대한 초기 수사는 완전히 망쳤다고 밝혔다. 엘에 대한 단서를 최대한 모아 2022년 1월과 5월 경찰에 엘의 동향을 전달하고 충분한 상황 설명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2022년 연초에 시작된 경찰 수사는 여름이 될 때까지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별다른 진전 없이 수사가 길어지는 상황에 원 에디터는 보도를 결심했고 8월 29일 얼룩소와 KBS가 함께 엘의 실체에 대한 단독 보도를 했다. 이틀 뒤인 31일 사건을 조주빈을 검거한 서울경찰청으로 이첩한 경찰은 6개 팀 35명 규모의 전담수사팀을 편성했다.
경찰 초기 수사에 대해 원 에디터는 “디지털성범죄 사건에 대한 경찰 내부 인식이 아직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언론이 주목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특별 수사 인력을 임시 배정하는 걸로는 안 된다. 경찰서와 경찰청의 디지털 성범죄 수사 분담 체계부터 점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원은지 에디터에 따르면 엘은 피해자를 협박하고 성착취물을 유포하며 “FBI(미국 연방수사국)가 와도 나 잡을 수 없을 걸” “나는 토르+VPN(익명으로 접속하는 방법의 일종) 안 되면 인터넷을 안 함” “내가 ‘개인작’ 하는 놈인데 (성착취 피해자를 유인할 때 사용한) 페이스북 계정이 진짜겠음?” “FBI에서 텔레그램 서버 해킹할 수 있을 정도는 돼야 나 잡을 수 있다” 등등의 공언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자신만만했던 엘이지만 8월 29일 ‘엘’의 실체를 다룬 단독 보도가 나온 직후 자취를 감췄다.
#범행 목적은 금전 아닌 '성착취 행각 뽐내기'
본격적인 수사에 돌입한 서울경찰청 전담수사팀도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엘의 행보가 이미 검거된 디지털 성착취범 조주빈·문형욱 등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엘은 고정적인 텔레그램 단체방을 두지 않고 수시로 방을 개설하고 폭파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성착취물을 유포했다. 당연히 텔레그램 대화명도 자주 바꿨으며 계정도 여러 개였다.
게다가 돈을 목적으로 한 범행도 아니었다. 경찰은 A 씨를 검거한 뒤 “금전 목적의 범행이 아닌 것으로 본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성착취물 제작·유포 등으로 금전적 이익을 취하려는 정황을 바탕으로 한 수사도 이뤄질 수도 없었다. 아직 최종 경찰 수사 결과가 나오진 않았지만 엘은 금전 목적보다는 자신의 디지털 성착취 범죄를 뽐내는 데 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부분이 엘 검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원 에디터의 ‘엘 검거에 부쳐’ 연재 글에 따르면 엘의 흔적이 발견된 곳은 2020년 6월 25일부터 8월 2일까지 운영된 채팅방 ‘아이돌 연예인 성희롱방’이었다. 엘이 본격적인 디지털 성착취 범행을 시작한 2020년 12월보다 앞선 시점이다. 연예인 딥페이크 사진과 영상은 물론이고 박사방 성착취 피해물까지 올라왔던 이 채팅방 참가자는 600명 이상 1000명 이하였다. 이 채팅방의 관리자가 엘이었는데 원 에디터는 또 다른 관리자인 가해자 B 씨와도 연락이 닿았다.
B 씨를 통해 엘이 2021년 상반기부터 ‘야동 자료 교환방’을 운영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점차 엘은 자신의 디지털 성착취 범죄를 더 많은 이에게 뽐내려 했는데 그 방식은 개개인에게 대화를 걸어 링크를 공유하는 방식이 아닌 참여 인원 많은 대화방에 본인방 링크를 공유하는 방식이었다. 심지어 참가자가 5000명 이상인 대화방에서 자신이 운용하는 대화방 링크를 공유하기도 했다. 그렇게 여기저기에 남겨진 엘의 흔적은 수사 과정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그렇게 경찰은 엘의 IP 주소를 확보하게 됐다.
#엘의 신상공개는 국내 송환 이후 이뤄질 듯
원 에디터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부터 엘 사건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반드시 잡힌다”는 메시지를 강조해왔다. ‘반드시 잡힌다’는 말은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인 동시에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한다. 원 에디터는 “디지털 성착취는 피해자가 조심하고 수사기관만 잘하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 시민과 온라인상 감시자를 비롯해 사회가 가진 모든 자원을 활용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만 근절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참고로 ‘엘’이라는 이름은 이번에 검거된 A 씨가 실제 사용하던 텔레그램 닉네임이 아니다. n번방 문형욱의 ‘갓갓’과 박사방의 조주빈의 ‘박사’가 텔레그램 닉네임인 것과는 다른 형태다. ‘엘’이라는 이름은 원은지 에디터가 기사 작성 과정에서 임의로 붙인 것이다. 왜 텔레그램 닉네임이 아닌 ‘엘’이라는 별도의 이름을 임의로 붙인 것일까. 원 에디터는 “n번방 보도 이후 가해자 닉네임을 검색해 성착취물을 찾아보는 사람들이 오히려 늘었다는 뼈아픈 기억을 갖고 있던 터라, ‘엘’의 본래 닉네임을 쓸 수 없었다”고 밝혔다.
현재 경찰은 그동안의 수사기록을 토대로 호주 경찰이 A 씨를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소지 및 제작 혐의’로 기소할 수 있도록 호주 경찰과 긴밀히 협력하여 수사를 진행 중이다. 또한 범죄인 인도 절차를 통해 국내 송환도 추진할 예정이다. 조주빈·문형욱 등과 같이 A 씨의 신상공개도 이뤄질 가능성이 높지만 먼저 국내 송환이 이뤄져야 한다.
다만 호주 경찰이 A 씨를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소지 및 제작 혐의 등으로 기소할 의지를 밝혀 호주 사법 처리 결과에 따라 A 씨 국내 송환은 조금 늦어질 수도 있다.
현재 서울경찰청은 A 씨와 함께 피해자를 유인·협박하는 과정에 직·간접 가담한 15명을 검거해 13명을 송치(구속 2명)했으며 2명은 계속 수사 중이다. 또한 A 씨가 제작한 영상을 판매·유포·소지·시청하거나 피해자 신상정보를 공개한 사람 등 10명을 추가 검거하여 8명을 송치(구속 3명)하고 2명은 수사 중이다.
전동선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