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돈 활용 아슬아슬한 투자…‘보증금은 반드시 갚아야 할 부채’로 인식 바꿔야
갭투자를 하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사정이 어떻든 그 자체에는 위험이 내포돼 있다. 전세를 놓는다는 것은 세입자를 대상으로 2년짜리 무이자 채권(혹은 약속어음)을 발행하는 일이다. 통상 2년이 지나면 세입자는 공간을 비워주고 집주인은 채무를 상환해야 한다. 동시이행 관계다. 요즘 역전세난은 집주인의 채무불이행에서 생긴다. 집주인은 약속어음을 부도내선 안 된다. 집주인은 만기가 되면 자신의 노력을 통해 적극적으로 채무상환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장의 또 다른 세입자를 구해서 채무상환(전세보증금 지급)을 하려고 하는데, 이는 ‘빚 돌려막기’나 다름없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채무자인 집주인의 무책임한 행동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버는 것은 자유지만, 경제적 약자인 세입자에게 피해를 줘선 안 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잠시 갭투자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중에 입주할 형편이 되지 않아 원하지 않는 장기 갭투자자가 될 수도 있다. 세상사는 애초 의도대로 잘 움직이지 않는다. 요즘 갭투자의 후유증으로 생기는 깡통전세 사태를 보면서 집주인들이 전세를 바라보는 시각부터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한 공익재단이 서울시내 200억 원짜리 빌딩을 물색했다. 임대수익을 통해 재단을 운영하기 위해서다. 재단 관계자가 관계당국에 알아보니 가급적 자기자본으로 건물을 사야 되며 대출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 건물에는 10% 정도의 세입자 보증금이 들어 있었다. 재단 관계자는 일반 거래와 같이 매입가에서 세입자 보증금을 뺀 180억 원(취득세·중개수수료 제외)이면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관계당국에서는 세입자 보증금도 빚(사적 대출)이고 세입자가 언제 나갈지 모르므로 은행 보통예금에 예치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재단은 규모를 줄여 건물을 매입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 때 장관 후보자가 갭투자로 아파트를 산 것을 두고 매서운 잣대를 들이댄다. 한 채를 샀든 두 채를 샀든, 당장 거주하지 않는 집을 사는 것은 잠재적 투기행위로 보는 것 같다. 언론에서 후보자를 검증할 때 프레임도 크게 다르지 않다. 후보자 자신은 억울하겠지만 말이다.
물론 공익재단 빌딩이나 장관 후보자의 사례를 일반 개인에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다만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보증금(전세금)은 내 재산이 아닌 빚으로,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맡긴 예치금이라는 점이다.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에 따르면 2020년 우리나라 전세·준전세 보증금 부채는 851조 원에 이른다.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갚아야 할 빚 규모가 메가톤급이다.
갭투자를 하더라도 세입자에게 적어도 미안함을 가져야 하고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투자할 때 갭투자가 초래할 수 있는 상황까지는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
요즘 모바일 부동산 앱에는 아예 ‘갭 가격’이 별도로 있는데 투자자들에게 인기다. 매매가격에서 전세가격을 뺀 금액(갭 가격)으로 투자를 할 수 있는 아파트를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기능적으로 갭 투자를 매우 쉽게,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안내하지만 한편으로는 갭투자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못 하게 만든다.
물론 모든 갭투자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그 위험성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빚을 내서 주식 투자했다가 망하면 피해는 자신에게만 그친다. 하지만 갭투자는 경제위기가 닥치면 자신뿐 아니라 세입자까지 언제든지 다칠 수 있는 아슬아슬한 투자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갭투자의 후유증이 깡통주택에서 그치지 않고 깡통전세로 연쇄적으로 나타난다는 얘기다. 이번 급락을 계기로 타인의 자본을 활용한 갭투자의 위험성을 한번 되짚어봤으면 좋을 것 같다.
박원갑 박사는 국내 대표적인 부동산 전문가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와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부동산학 석사, 강원대 부동산학 박사를 받았다. 한국경제TV의 ‘올해의 부동산 전문가 대상’(2007), 한경닷컴의 ‘올해의 칼럼리스트’(2011)를 수상했다. 현재 KB국민은행 WM스타자문단 부동산수석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정책 자문위원이다. 저서로는 ‘부동산 미래쇼크’,‘ 한국인의 부동산 심리’ 등이 있다.
박원갑 KB국민은행 WM스타자문단 부동산수석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