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을 함께한 뮤지컬 속 안중근, 스크린에선 “더욱 인간적인 모습 부각하고자 했다”
“창작 뮤지컬을 하는 친구들은 다 꿈꾸는 일이죠, 뮤지컬의 영화화라는 게. 사실 저도 아주 ‘조금’은 제가 주인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했는데(웃음), 그래도 엄청난 자본이 들어가는 작업인 데다 이미 뮤지컬에서 영화로 넘어간 좋은 배우들도 많으니 그럴 일이 없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1년 전에 사무실로 전화가 온 거예요. 느낌이 딱 둘 중 하나다 싶었죠. ‘성화야, 네가 안중근 의사다’ 아니면 ‘성화야, 배우 누가 안중근 역을 하기로 했는데 네가 도와줘’(웃음).”
한국 창작 뮤지컬 ‘영웅’의 영화 제작 소식을 처음 전해들은 것은 2014년의 일이었다. 그날도 뮤지컬 배우 정성화로서 안중근 의사를 연기하고 있던 그는 윤제균 감독이 공연을 보러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이 작품을 뮤지컬로만 놔두기엔 아깝다며, 영화화를 계획하고 있다는 귀띔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주인공으로 낙점될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정성화에게 출연 결정 소식을 들은 날의 기억은 충격적인 행복으로 남아있었다.
“감독님이 뜨끈뜨끈하게 갓 뽑아온 시나리오를 주시면서 그러시더라고요. ‘성화야, 너를 안중근 의사 역으로 결정했어. 그러니 이제부터 네가 살을 빼줬으면 좋겠다’(웃음). 기분이야 날아갈 것 같았는데 한편으론 무섭기도 했죠. 14년 가까이 뮤지컬 ‘영웅’을 해왔는데 영화를 잘못하면 어떡하지? 망치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에 허리띠랑 운동화 끈을 꽉 조여 매고 정말 열심히 준비했어요. 살도 3개월 만에 14kg를 빼서 72kg까지 빠졌는데 체력이 딸려서 일정이 겹쳤던 뮤지컬 공연 중에 쓰러지기도 했어요.”
영화 ‘영웅’은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 동안의 이야기를 그린 뮤지컬을 원작으로 하는, 국내 최초의 ‘오리지널 뮤지컬 영화’다. 원작이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기에 그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 것이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더 영화다운 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데에 모두가 머리를 맞대야 했다는 게 정성화의 이야기다.
“공연에서 안중근 의사는 영화보다 강력하고 주도적으로 보이는 반면 영화에선 그분의 철학과 문인으로서의 면모, 그리고 더욱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고자 했어요. 그래서 영화 속 안중근 의사를 연기할 땐 일상 연기가 가장 중요했죠. 툭툭 내뱉는 대사가 자연스러워야 했기 때문에 너무 군인 같거나 히어로 같은, 멋있어 보이려는 건 피했어요. 두려울 땐 한없이 두렵고, 약할 땐 또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런 걸 담백하게 담아내는 게 중요했거든요.”
일상적인 대사가 자연스럽게 노래로 연결될 수 있도록 간극을 채워내는 것도 또 다른 숙제가 됐다. 스크린을 통해 영화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자신의 모습을 처음 보고 “너무 쑥스러웠다”며 웃음을 터뜨린 정성화는 무대와 영화에서의 노래 연기의 차이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얼굴(표정)이 갑자기 열리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배우가) 영화 속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일이 생기거든요. 또 뮤지컬에서 노래들은 대사같이 느껴져야 하는데 영화는 또 다르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독님과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아무래도 공연은 큰 홀에서 배우의 목소리와 에너지가 다 채울 수 있어야 하는데 영화는 코앞에 카메라가 있어서 거리가 짧잖아요(웃음). 무대랑 똑같이 노래하고 연기하면 큰일이니까 연습할 때 스마트폰을 얼굴에 갖다 대고 노래한 뒤에 모니터링하고 그랬죠.”
영화 ‘영웅’은 독립군 정보원인 설희(김고은 분)의 솔로곡 ‘그대 향한 나의 꿈’을 제외하면 모두 원작과 같은 노래를 공유한다. 타이틀곡인 ‘영웅’과 가장 유명한 곡으로 꼽히는 ‘누가 죄인인가’,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을 담은 ‘장부가’까지 배우들은 모두 현장에서 직접 노래를 불러 1차 녹음을 마쳤다고 했다. 특히 영화 ‘영웅’에서도 가장 중요한 노래로 꼽힌 ‘장부가’는 촬영 최다 테이크를 거쳐 완성됐다는 뒷이야기도 있었다.
“노래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분은 중요한 음을 제대로 못 낸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러면 그 다음 가사부터 계속 신경 쓰여서 곡 전체를 다 못 부르게 되거든요. 무대가 아니라 촬영이니까 그 모든 여정을 다시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지죠(웃음). 저희 맨 마지막 노래가 ‘장부가’인데 그때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촬영 테이크를 13번이나 갔거든요. 이번 작품 최다 테이크였어요. 워낙 중요한 노래니까요. 나중엔 기가 빨려서 무아지경에 빠지게 됐는데, 오히려 무아지경 상태로 부른 노래가 그냥 부른 것보다 훨씬 낫더라고요(웃음).”
무대와는 또 다른 고생을 거듭하며 완성해 낸 작품이기에 정성화가 느끼는 애정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영화의 촬영이 끝난 시점이 코로나19 유행의 시작과 맞물리면서 수차례 개봉이 미뤄지다 3년 만에 겨우 빛을 보게 된 작품이었다.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은 무대와 영화를 모두 경험한 그로서 ‘영웅’의 개봉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졌을 터다.
“코로나19 시국에 배우들뿐 아니라 회사가 휘청일 정도로 많은 손실을 보신 분들이 정말 많았어요. 저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많이 힘든 시기였는데 특히 제일 걱정됐던 건 제작사가 망하면 어떡하나였죠. 그렇게 된다면 경기가 살아나더라도 작품의 제작 편수도 줄어들고, 산업 전반도 축소될 텐데 어떡하나…. 그런데 너무 감사했던 게 손 소독하고 마스크를 끼고 극장에 오시는 관객분들이 계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나라 공연만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관객분들에게 너무 감사하죠.”
그런 관객들에게 단 한 가지 바라는 바가 있느냐는 질문에 정성화는 “안중근 의사가 대한민국 사람들의 자긍심이듯, 이 영화가 우리나라 뮤지컬 영화의 자긍심이 됐으면 한다”고 답했다.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이지만 유독 뮤지컬 영화나 드라마는 할리우드 대작이거나 디즈니 작품이 아닌 이상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직전에 개봉한 한국 뮤지컬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관람객들의 호평을 받았음에도 이슈화되지 못한 채 막을 내리는 등 국내에선 여전히 비주류 장르다. 그런 현실 속에서 ‘영웅’이 변곡점이 되는 것이 정성화의 꿈이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