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드롬 일으킨 명작 연재 종료 26년 만에 일본서 개봉…홍보 없는 ‘은폐 마케팅’ 코어팬 중심 흥행 불지펴
#만화 ‘슬램덩크’가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
슬램덩크는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고교 농구부 학생들의 청춘을 압도적인 작화로 그린 전설의 만화다. 1990년 ‘주간소년점프’에 연재가 시작됐고, 비슷한 시기 미국프로농구(NBA) 경기를 위성방송을 통해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인기에 불이 붙었다.
정점은 1995년이었다. 권두를 슬램덩크가 올컬러 장식한 주간소년점프는 역대 최고 판매부수인 653만 부를 팔아치웠다. 또한, 일본 전역의 중·고등학교에서는 농구부원이 급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농구협회 측에 따르면 “1990년 등록된 농구경기 인구수는 81만 명이었으나 슬램덩크 연재가 종료된 1996년에는 1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연예인과 유명인사들마저 농구화를 즐겨 신었으며, 특히 만화 속 주인공 강백호(일본판 이름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신은 ‘에어조던1’은 인기가 폭발했다. 그야말로 ‘신드롬’이라 불릴 만한 현상으로, 일본은 공전의 농구붐을 맞이한다. 인기는 비단 일본에만 그치지 않았다. 만화 배경지인 가마쿠라 고등학교 역 건널목은 인증샷을 찍으려는 해외 팬들로 늘 붐볐다. 이른바 ‘성지’로 떠오른 곳이다.
농구 전문사이트를 운영하는 무라카미 나루 대표는 슬램덩크 열풍에 대해, “누구나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등장인물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인기의 한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일례로 슬램덩크는 단순히 주인공 강백호의 천재적인 활약만을 그리지 않는다. 개성 있는 다양한 주변 인물이 등장하며, 무엇 하나 버릴 캐릭터가 없다.
무라카미 대표는 “극 중 ‘안경선배’ 권준호(고구레 기미노부)에게 몰입했다”고 한다. 평소 눈에 띄지 않지만, 할 땐 확실히 하는 인물이다. 그는 “꼭 히어로가 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은가. ‘안경선배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며 청춘을 회고했다.
흔히 스포츠만화 속 라이벌은 ‘악당’처럼 묘사되지만, 이 작품에서는 모두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고 성장한다. 주인공이 멋진 장면을 독점하지도 않는다. 승패를 떠나 농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주인공인 셈이다. 때로는 승부에 지더라도, 패배를 넘어선 ‘청춘의 아름다움’을 그렸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지도자들에게 미친 영향도 크다. 일본 남자농구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기타하라 노리히코는 1988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가 지도자의 길을 걷는 동안, 슬램덩크 연재가 맞물렸다. 만화에는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라는 명대사가 나온다. 극 중 감독 캐릭터, 안 선생님이 했던 말이다.
기타하라는 “특히 안 선생님의 지도 방식이 크게 다가왔었다”고 밝혔다. 당시는 엄격한 지도자가 주류를 이뤘던 시절이다. “자신 또한 선수들을 혹독하게 다그치는 코칭을 하고 있었던 터라 반성의 나날이었다”고 한다. 슬램덩크 속 지도 방식은 마치 지침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1996년 슬램덩크의 연재가 돌연 종료된다. 작가의 의도대로 우승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청춘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리는 결말이었다. 하지만 연재가 종료된 후에도 인기는 시들지 않아 2004년 단행본은 누계 1억 부를 돌파했다. 지금도 계속 팔리고 있다.
#비상식을 상식으로 바꾼 작품의 ‘힘’
긴키대학의 켄토 시이나 교수는 “슬램덩크의 경우 인물들의 심리상태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라고 평가한다. “교육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은 물론, 비즈니스에서도 통하는 요소가 발견되는 등 수요가 다방면에 이른다”는 설명이다. 이어서 그는 “언젠가 후속편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전설의 만화’로 회자되는 데 일조했다”고 덧붙였다.
연재 종료로부터 26년. 드디어 극장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12월 3일 개봉했다. “줄곧 기다렸다”는 기쁨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영화 공개 한 달 전 ‘성우진이 기존 TV 애니메이션과 달라진 것’이 발표되자 소셜미디어(SNS)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와 관련, 영화 제작진 측은 “완전히 새로운 슬램덩크를 다시 만나길 바란다”고 밝혔다.
보통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들은 개봉 첫 주 흥행 기세를 극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홍보하며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이번 슬램덩크 극장판은 철저하게 정보를 감추는 선택을 했다. 주요 줄거리조차 공개하지 않았다.
이러한 비밀주의는 이노우에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이 ‘관람객들이 편견 없이 직접 체감하는 게 가장 좋다’고 판단해서다. 인터넷을 켜면 영화 개요나 후기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하게 극장판을 즐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정보를 최대한 드러내지 않은 쪽을 택했다.
최근 대작 영화의 경우 예고편에서 클라이맥스 장면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슬램덩크는 프로모션 면에서 볼 때 ‘비상식적인 접근’이다. 반면, 주목도가 워낙 높은 작품인 터라 이를 비판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흥행을 우려하는 부정적인 기사가 쏟아지는 가운데, 개봉일을 맞았다. 그러나 결과는 대반전이었다. 공개 첫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팬들의 호평 후기가 쏟아진 것이다. 트위터에서는 ‘슬램덩크’가 실시간 트렌드에 올라갔으며, 관련 게시물은 6만 6000건이 넘었다. 정보를 숨기다 보니 프로모션이 미미했음에도 불구하고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개봉 이틀 만에 84만 7000명의 관객을 동원, 흥행 수익은 12억 9000만 엔(약 126억 원)에 달했다. 극장판 일본 박스오피스 역대 1위인 ‘귀멸의 칼날’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올해 초대박이 난 영화 ‘원피스 필름 레드’에 버금가는 규모다. 만화 연재가 종료된 지 26년이나 지난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경이로운 히트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 매체 ‘동양경제온라인’은 “탄탄한 코어팬이 많은 영화라면 입소문을 통해 얼마든지 작품의 장점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히트로 명확하게 증명됐다”고 전했다.
슬램덩크는 주인공 강백호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빠져드는 이야기다. 승리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패배 또한 위대하다는 걸 일깨워준다. 강백호가 농구를 만난 것처럼 우리는 좋아하는 무언가를 찾고 싶어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작품이 슬램덩크다. 바로 이 점이 시대를 초월해 폭넓은 세대로부터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