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고위층이 지능적인 수법으로 뇌물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복을 한 채로 인적 없는 길에서 스친 사람이 떨어뜨린 돈 봉투를 슬며시 주워가는 방법이었다. 그 경찰 간부가 입건이 됐다. 그는 범죄를 부인했다.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검사가 씩 웃으면서 증거를 내놓았다. 그들이 스친 인적 없는 길가 전봇대 위에서 내려다보던 CCTV가 잡은 영상이었다.
기계가 법치주의를 만들고 있다. 그런데 법을 만드는 정치인들은 법대로 하자면서 현실은 그 반대다. 뇌물죄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올라와도 깔아뭉갠다. 당 대표의 개인적 위법사실을 정당이 보호하기 바쁘다. 서민의 법치도 겉만 화려하고 내부는 작동이 느려터진 부실한 기계 같다. 경찰에 고소를 해도 한없이 처리가 늘어지는 현실이다. 검찰은 어떨까. 형사재판장을 한 판사 출신 변호사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내가 형사사건에는 죄가 되는지 아닌지 누구보다 전문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뢰인이 오면 유죄확신이 서는 사건에 대해서만 고소를 해 줍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고소한 다섯 건 중에 하나만 기소가 돼요. 그걸 보면서 저는 법치주의의 실현은 20퍼센트(%)만 된다고 생각하죠.”
5년 전에 제기된 형사 고소사건이 있다. 전혀 진척이 없었다. 어느 날 담당 검사실에서 전화가 왔다. 새로 부임한 검사가 이렇게 말했다.
“제가 검사실 캐비닛을 뒤지다 그 사건을 발견했어요. 전임자가 잊어먹고 그냥 처박아 둔 것 같습니다.”
검사는 간단한 실수지만 관련 당사자는 법치주의의 밖에 있는 투명인간이 된 셈이다. 법원의 재판도 한없이 늘어진다. 언제 끝이 날지 가늠할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전에는 판사도 승진하기 위해 경쟁이 치열했다. 밤중에도 판사실의 불이 켜져 있었다. 어떤 판사들은 기록을 집으로 가져가서 밤을 새면서 판결문을 쓰기도 했다. 판사마다 밀린 사건이 없게 하려고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얼마 전 판사 사이의 계급이 없어졌다. 승진경쟁에 휘말리지 않고 공정한 재판을 하기 위해서라는 취지였다. 계급이 없어진 법원의 사건처리는 한없이 늘어졌다. 4년 전에 시작한 간단한 민사사건이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재판도 제대로 열리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특별히 공정해지지도 않은 것 같다.
국민들의 법치의식은 진영논리에 따라 그 법이 달라져 있다. 민사사건이 진행되던 한 법정에서였다. 토지 소유자가 그 땅을 무단 점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가달라는 내용이었다. 남의 땅을 불법점유하고 있던 사람들이 재판장에게 이렇게 대들었다.
“우리는 가진 자들만 보호하는 대한민국의 법을 따를 수 없어요. 땅을 못 내놓겠습니다.”
겁을 먹은 재판장은 플래카드를 들고 법정 밖에서 눈알을 부라리는 그들에게 법치가 무엇인지 말하지 못했다. 공장을 점령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노조원에 대한 고소에 경찰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노조는 성역이었다. 법치 일탈의 근원지가 대법원일 수도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뇌물죄로 징역을 살았다. 나는 그 관련된 재판에 변호사로 참여했었다. 국가정보원의 예산이 일부 청와대로 간 걸 나는 뇌물은 아니라고 보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1·2심의 판사들이 다 똑같았다. 그런데 유독 담당대법관만 뇌물이라고 하면서 재판을 다시 하라고 했다. 나는 그걸 법치로 보지 않는다. 물론 내가 틀릴 수도 있다. 대법원의 내부 심리에 CCTV를 달 수는 없다. 법치의 실현은 정의의 CCTV 역할을 하는 대법관을 필요로 한다.
윤석열 대통령 임기 내에 대법원장과 대법관 거의 전원이 바뀐다. 출세욕에 자신의 정치성향을 관철하려는 사람이나 편향된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올곧은 대법관의 임명이 법치의 실현이다. 그게 사법개혁일 수도 있다. 법치의 실현 정도는 그 나라 민주화의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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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