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법 위반 혐의’ 민주노총 본부 사상 첫 압수수색…국정원 힘 싣는 동시에 노동개혁 등 다양한 포석 관측
1월 18일 국정원은 서울시 중구 정동에 있는 민주노총 본부,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동 민주노총 산하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사무실, 제주 세월호 제주기억관 평화쉼터 등 10여 곳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섰다. 민주노총 조직국장 A 씨를 중심으로 민주노총 산하 기관 간부 등이 함께 얽혀 있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조준했다.
방첩당국에 따르면 국정원은 북한 지령문, 암호화 프로그램 ‘스테가노그래피’ 등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민주노총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스테가노그래피는 기밀 정보를 이미지 파일에 숨기는 방식으로 전달하는 수단이다. 국정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근거로 민주노총 본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국정원 압수수색 키워드는 세 가지다. 먼저 민주노총 간부와 북한 공작원 접선 의혹이다. 압수수색 대상인 민주노총 조직국장 A 씨, 민주노총 산하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간부 B 씨,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간부 출신 C 씨, 제주 평화쉼터 대표 D 씨가 해외에서 대남 공작원 리광진 등을 접선했는지가 핵심 쟁점이다.
앞서 언급한 인물들은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중국 베이징·광저우·다롄, 베트남 하노이, 캄보디아 프놈펜 등 지역에서 북한 노동당 직속 대남공작기구인 문화교류국 지령을 받았다는 의심을 받는다. 지령을 전달한 대남 공작원 실명도 줄줄이 공개됐다. 국정원에 따르면 민주노총 간부급 인사들에게 지령을 전달한 대남 공작원은 리광진, 배성룡, 김일진, 전지선 등 총 5명인 것으로 파악됐다.
두 번째 키워드는 ‘자주통일 민중전위’다. 자주통일 민주전위는 경남 창원·진주, 전북 전주 등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결성된 북한 연계 지하 조직을 총괄하는 상부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국정원은 이번 압수수색을 통해 자주통일 민중전위가 민주노총에 침투했는지 여부를 들여다보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실명이 공개된 북한 대남 공작원 리광진 이력이 마지막 키워드다. 2021년 9월 자주통일 충북동지회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 있다. 당시 자주통일 충북동지회에게 지령을 내린 인물로 지목된 것이 리광진이었다. 리광진은 1990년대부터 시행한 대남 침투 공적을 인정받아 북한 당국으로부터 영웅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이례적이면서도 전격적인 민주노총 압수수색을 두고 정치권에선 윤석열 정부의 노림수가 담겨 있다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이번 민주노총 압수수색으로 문재인 정부에서 통과시킨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와 관련한 논란이 재점화됐다”면서 “이와 더불어 윤 대통령이 대선 당시 공약한 노동개혁 추진 명분도 강화될 수 있다”고 바라봤다.
또 다른 여권 관계자는 “윤석열 정부가 민주노총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모양새가 됐다”면서 “국정원 대공수사권 부활에 힘을 싣는 동시에 노동계 최대 세력 중 하나인 민주노총을 견제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또 지지층 결집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내다봤다.
2020년 12월 국회에선 국정원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개정안 골자는 국정원이 보유하고 있던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데에 있었다.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3년간 유예기간을 거친 뒤 2024년 1월부터 국정원 대공수사권은 경찰로 완전 이관될 예정이다. 유예기간 중 정권교체가 이뤄졌고, 여당이 된 국민의힘은 국정원 대공수사권 유지를 주장하고 있다. 민주노총 압수수색은 ‘대공수사권 유지론’ 명분으로 부상하고 있다.
‘윤석열표 노동 개혁’을 앞당기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는 게 여권 기류다. 윤 대통령이 공약한 노동 개혁 골자는 ‘주 52시간 근무’로 대표되는 근로시간의 유연화와 호봉제 위주 임금 체계를 직무·성과급제로 개편하는 것이다.
양대 노총인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윤석열 정부 노동 개혁 공약과 관련해 한국 사회 장시간·저임금 노동을 고착시킬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민주노총 압수수색 국면 이후 노동 개혁 드라이브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 경우 정부와 노동계의 대충돌이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이다.
정치권 복수 관계자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가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 이슈 및 민주노총 사이 연결점을 만든 뒤 ‘대공·노동 드라이브’를 한번에 해결하려는 의도를 내비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야권 관계자는 “민주노총을 간첩집단으로 프레이밍해서 현 정부가 원하는 방향의 노동 개혁을 시도하겠다는 의도”라면서 “차기 총선을 위한 지지층 결집 카드로 이번 이슈를 활용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대규모로 이뤄지고 있는 국정원발 간첩단 수사에 대해 국정원 대공수사권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적인 수사 및 노동 탄압으로 규정하며 대정부 규탄을 이어가고 있다.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은 “국정원이 대공수사권 유지를 위해 부풀리기 수사를 하는 것 아닌지 우려스럽다”면서 “정권 차원에서 노동탄압, 나아가 공안몰이를 하려는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1월 19일 기자회견을 열어 윤석열 정부를 규탄했다. 양 위원장은 “수십 년 동안 쌓아 온 민주주의가 대통령 한 명에 철저히 유린되는 현실이 참담하다”면서 “민주노총 압수수색은 대통령 사주를 받아 국정원이 메가폰을 잡은 한 편의 쇼”라고 했다.
양 위원장은 “국가보안법은 역사 유물로 사라졌어야 했다”면서 “일제강점기 치안유지법에 뿌리를 둔 국가보안법이 다시 활개를 치는 현실은 청산하지 못한 과거 역사가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 깨닫게 한다”고 했다. 이어 양 위원장은 “(윤석열 정부가 민주노총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것은) 무능과 무책임으로 망가진 외교·민생 및 여당 자중지란을 덮기 위한 것”이라면서 “정권을 향해 쓴소리를 멈추지 않는 민주노총 입을 막기 위한 색깔 공세”라고 공세 수위를 높였다.
그는 “민주노총은 윤석열 정부 폭주를 막기 위해 흔들림 없이 싸워 나갈 것”이라면서 “5월 1일 노동절을 기점으로 힘찬 총궐기를 진행할 예정이며 7월 총파업 투쟁으로 윤석열 정부와 맞설 것”이라고 밝혔다.
노동계에서 윤석열 정부에 대한 규탄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전·현직 정보당국 관계자들 사이에선 민주노총 압수수색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압수수색 이후로 ‘국정원 국내파트 부활 가능성’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후문이다. 국내파트는 국정원 대공수사 핵심으로 꼽혔던 조직이다.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국정원 내부에서 국내파트 힘이 완전히 빠졌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전직 정보당국 관계자는 “국정원 내부 국내파트 부활 선결과제는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를 원위치 시키는 것”이라면서 “정보당국 내부적으론 검수완박으로 검찰 수사권이 경찰로 대부분 이관된 상황에서 국정원 대공수사권까지 경찰로 이관되면 경찰 조직 비대화를 비롯해 경찰 행정 과부하 등 수사 효율성 약화가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민주노총 압수수색 국면 이후로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흐름은 추후 국정원에 어느 정도 힘이 실릴지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