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매? 요즘에는 채찍 대신 당근
▲ 위부터 KBS <개그콘서트>, SBS <개그투나잇>, MBC <웃고 또 웃고> 방송화면 캡처. |
개그계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의리를 칼같이 여기던 한 선배 개그맨이 후배들에게 하나됨을 강요하며 칼로 그들의 배에 일일이 상처를 냈다는 내용이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실제로 한 방송사의 기수 남자 개그맨들에겐 하나같이 배에 작은 흉터가 존재한다. 지금은 활동이 뜸한 개그맨 A가 문제의 그 선배 개그맨이었던 것. 의리만큼이나 정 또한 넘쳤던 A의 무시무시한 후배 사랑을 모르는 개그맨들은 없을 정도지만, 이제는 다 옛날이야기라는 게 개그맨들의 이구동성이다.
특히 7년 전 개그맨 김진철의 후배 각목 폭행 사건 이후 각 방송사 희극인실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사랑의 매로 불리던 선배들의 훈육 대신 소통과 대화가 강조된 선후배 사이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게 됐다.
공채 코미디언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MBC 희극인실. 최근 이들이 출연 중이던 코미디 프로그램 <웃고 또 웃고>는 파업으로 인해 몇 주째 결방되고 있다. 그럼에도 희극인실 개그맨들의 모임은 지속되고 있다.
▲ 이혁재. |
김진철 사건으로 한동안 뒤숭숭했던 KBS 희극인실의 분위기는 요즘 어떨까. <개그콘서트>에 출연 중인 개그맨들은 요즘이 가장 정감 있는 분위기라고 입을 모은다. 여성인 서수민 PD 특유의 섬세한 분위기도 한몫하거니와 연이은 시청률 고공 행진으로 인해 인상 쓸 일 자체가 없다는 게 그들의 이야기다. 특히 김진철 사건 이후 얼차려와 구타는 완전히 사라졌으며 전체 집합 또한 드문 일이 됐다고 한다.
그렇지만 고참급 개그맨 B는 “전체적으로 따뜻한 분위기지만 여전히 KBS 희극인들만의 군기와 기강은 확실하다”고 말한다. 그는 “선배의 사랑의 매가 허용될 때가 종종 있는데, 다름 아닌 아이디어 회의 때”라며 ‘군대의 사격훈련’에 비유했다. 구타가 사라진 군대도 중요한 사격훈련 때는 구타가 허용되듯 희극인실 내에서도 아이디어 회의만큼은 엄격하다. B는 “선배들이 아이디어를 까이고(담당 PD의 코너 검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올 때 눈치 없이 떠드는 후배들은 예나 지금이나 눈물 쏙 빠지도록 혼이 난다”라며 “뿐만 아니라 아이디어 회의 시간에 늦잠을 자서 늦게 오거나 소품 등을 잊어버리는 등 불성실한 행동이 적발될 때 역시 어김없이 큰 소리가 나곤 한다”라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정감 있는 분위기만큼은 이어지고 있다. B는 “요즘엔 선배들이 느슨해진 분위기 다잡으려 폼이라도 잡으려 하면 후배들이 먼저 ‘선배님 고소할 겁니다’라고 농을 칠 정도로 선후배 사이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돈독하다”며 “선후배 간 장벽이 많이 무너지다보니 회의 때도 후배들이 적극 나서는 일이 많아지면서 인기 코너의 핵심 캐릭터를 후배 개그맨들이 도맡아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라고 말한다.
KBS 희극인실에도 찬바람이 쌩쌩 불 때가 있다. 다름 아닌 전설의 대선배들이 등장할 때다. 어지간한 군인보다 군기가 날카로운 시절의 대선배들을 만나면 후배 개그맨들은 깜짝 깜짝 놀라곤 한다. 아직 경력이 짧은 개그맨 C는 “불쑥 불쑥 사찰(?)에 나서는 대선배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난다”며 “방송 3사 개그맨들을 주먹 하나로 평정했다는 이야기나 구타로 후배를 내놓았다는 이야기 등 전설 속의 대선배들은 얼굴만 봐도 무섭다”고 전한다. 이들이 무서워하는 개그맨들은 주로 80~90년대 활동했던 이들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KBS 희극인실을 찾아 군기를 잡거나 하진 않는다. 오히려 후배들을 격려해주고 기를 세워주고, 때론 회식까지 시켜주고 돌아간다고 한다.
종편 채널 개그 프로그램 분위기는 어떨까? MBN <개그공화국>에 출연하고 있는 KBS 공채 출신의 한 개그맨은 “방송 3사 공채 개그맨들이 헤쳐모인 터라 딱히 군기를 잡는 문화가 없다. 서로의 스타일을 존중해주며 자유 경쟁을 펼치기 때문에 아이디어 회의도 수월한 편”이라면서도 “아직은 회식 등을 통해 돈독한 우정을 쌓을 일이 없어 아쉽다”라고 말한다.
아무리 선후배 사이의 우정이 돈독해졌다지만 개그맨 사이에서 절대 깨질 수 없는 벽이 있다. 우선 공채와 특채 사이의 벽이다. 공채 개그맨들은 자신들이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 개그맨이 된 터라 낙하산 같은 특채 개그맨들을 곱게 보지 않는 편이다. KBS 특채 출신인 ‘블랑카’ 정철규는 이후 정식으로 공채 기수가 됐음에도 특채 출신으로 낙인 찍혀 인사조차 안하는 후배들이 있어 마음고생을 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나이보다는 철저히 공채 기수를 중심으로 한 선후배 관계도 또 하나의 벽이다. 데뷔 전 절친이었던 개그맨 D과 E. 이들은 함께 KBS 공채시험을 통과해 멋진 콤비를 이루려 했지만 아쉽게도 D만 합격하고 E는 탈락했다. 이듬해 E 역시 공채 시험을 통과했지만 이들은 이미 절친이 아닌 선후배 사이였다. 동갑이며 친한 사이였음에도 D는 E를 철저하게 후배로 취급하며 ‘선배님’ 소리를 강요했다. 이들 사이는 지금까지도 물과 기름 같다고 한다.
주영민 연예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