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개인 기량보다 선수 간 유대감이 성과 만들어…부상에 발목 잡혀 남들보다 일찍 은퇴“
한국 축구는 지난 30년간 각종 메이저 대회에 본선 무대를 밟고 있다. 그러나 1983년 당시엔 좀처럼 U-20 월드컵에 나서는 대표팀이 주목을 받기 어려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A대표팀의 월드컵 본선 경험은 1954년이 유일했다. 4강에 진출한 1983년 U-20 대표팀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축구 변방 대한민국의 4강 진출이라는 선전에 당시 외신들은 '붉은 악마'라는 별칭을 붙였다. 이는 현재 우리 대표팀의 응원단 이름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이 특별한 애칭의 탄생 이후 40년이 흘렀다. 강산이 네 번 변한 세월, '4강 신화'의 주역 중 한 명인 신연호 현 고려대 감독을 만나 '역사'를 되짚어봤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20세 청년은 어느덧 60세가 됐다. 당시 팀을 이끌던 '호랑이 지도자' 박종환 감독의 나이를 훌쩍 넘어섰다. 신연호 감독은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지도자로 보낸 세월도 짧지 않다. 그때 감독·코치 선생님들께 섭섭했던 것 중 내가 지도자를 하다 보니 이해되는 부분들이 많다"며 웃었다.
그는 '1983 멕시코 U-20 월드컵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에 "벌써 40년이 지난 이야기"라며 손사래를 치면서도 눈을 반짝이며 세세하게 순간순간들을 짚어냈다.
연령별 대표팀을 통틀어 국제축구연맹(FIFA) 주관 대회 최초의 4강 진출, '신화'의 배경에는 지독한 훈련이 있었음이 잘 알려져 있다. 고지대인 개최국 멕시코의 환경에 대비해 박종환 감독이 선수들에게 마스크를 쓰게 하고 대회를 준비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맞다. 마스크를 쓰고 훈련을 했다(웃음). 그땐 감독님이 워낙 무서우셔서 시키는 대로 했다. 나중에 알려지기로 과학적으로 효과가 없었던 훈련이라고 하더라. 하지만 스포츠 과학의 관점에서는 의미가 없었을지라도 '우리는 열심히 준비했다'는 자신감을 키우는 데는 도움이 됐을 것이라 본다."
4강 신화를 썼지만 대회 시작은 좋지 못했다.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0-2로 패했다. 신연호 감독은 "많은 선수들이 '대회가 끝났다'고 생각했다"며 "두 번째 상대가 개최국 멕시코였기 때문이다. 개최국인 멕시코에는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첫 경기 패배 후 신 감독은 예상치 못한 반응과 맞닥뜨렸다. 그는 "박 감독님뿐 아니라 그때는 모든 지도자분들이 선수들에게 호되게 하던 시절이었다"며 "첫 경기 지고 '우린 죽었다' 하고 라커룸에 들어갔는데 감독님이 '괜찮다, 다음 경기에 할 수 있다'고 너무나도 부드럽게 격려해주셨다. 놀라기도 했지만(웃음) 다음 경기를 잘 준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던 것 같다"고 전했다.
예상대로 멕시코전에서는 선제골을 내주며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대표팀은 전반전에 동점골을 넣었고 후반 막판 극적으로 신연호 감독의 골이 터져 역전승을 일궈냈다.
"운이 좀 따르기도 했던 골이다. 슈팅을 했는데 공이 상대에 맞고 튀어 올랐다. 상대 골키퍼가 앞선 슈팅을 막으려 쓰러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공중에 있는 볼을 얼른 머리로 밀어 넣었다. 골을 넣고 뒤돌아서서 세리머니를 하는데 전광판 시계가 이미 후반 44분을 넘었더라.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겠다는 생각이었고 그 생각대로 됐다."
신연호 감독은 기적의 멕시코전 이후 "순조로운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멕시코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를 이겼다고 우리를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엄청난 응원을 보내줬다. 자신감을 찾는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기세를 탄 대표팀은 이어진 호주와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우루과이와 8강전에서 연승을 거두며 4강 무대를 밟았다.
신연호 감독은 1983년 U-20 대표팀의 성공 요인으로 '팀 분위기'를 꼽았다. 그는 "물론 우리 세대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들을 모은 팀이다. 하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개개인의 기량이 최고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또래 친구인 선수들끼리 사이가 정말 돈독했다. 유대감이 좋았달까. 공 좀 더 잘 찬다고 잘난 척하는 친구가 전혀 없었다. 박종환 감독님의 작전을 정말 '기계'처럼 수행했다"고 말했다. 이어 "반면 우리 세대 전후로는 더 대단한 스타 선수도 있었으나 오히려 그런 점이 팀워크에는 불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소위 말하는 호날두(포르투갈) 같은 선수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선수들에게는 대규모 국제 대회가 처음이었지만 사령탑인 박종환 감독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2년 전 U-20 월드컵에 감독으로 이미 참가한 경험이 있었다. 신 감독은 "감독님이 한 번 해보셨기에 그 경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며 "40년 전 아닌가. 어린 선수들이 외국 음식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을 때다. 멕시코 음식 정말 못 먹겠더라(웃음). 그런 문화적 차이를 이미 경험해본 박 감독님이 현지에서 감독 외에 요리사 역할도 겸하셨다. 원흥재 코치도 고생 많으셨고 많은 일을 하셨다. 그때 멕시코에서 김치찌개를 끓인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화를 만들고 돌아오자 '천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사랑을 받았다"고 말한다.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라 멕시코에서는 한국의 분위기를 알 수 없었다. 현지 신문에 붉은 글씨로 우리 이야기가 대서특필되기에 어느 정도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상상 이상이었다"고 회고했다. 귀국길, 공항에서는 짐을 찾을 새도 없이 '카퍼레이드' 길에 올랐다. 공항에서 서울 남산의 호텔까지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호텔방에 들어가자 직접 찾지 못한 짐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고 한다.
"그길로 호텔에서 3일가량 보냈고 향후 신혼여행에서 사용할 수 있는 호텔 이용권도 받았다. 축구협회, 정부, 고향 등 각종 단체에서 격려금, 포상금 등으로 100만 원씩 주셔서 수백만 원을 받았다. 지금이야 100만 원이 우스울 수 있지만 그때가 1983년이다. 어딜 가나 환영받고 사랑받던 시절이다."
U-20 월드컵 5경기 3골로 전에 없던 성공을 거둔 신연호 감독, 그를 비롯한 다수의 동료들, 코치진이 축구 스타로 떠올랐다. 장밋빛 미래만 드리운 듯했지만 그러나 신 감독은 기대만큼 성장하지는 못했다. 1983년 말부터 곧장 A대표팀에 이름을 올려 주축으로 활약했지만 그의 대표팀 경력은 1984년에서 멈췄다. 소속팀 현대 호랑이에서도 부침을 겪었다.
그는 "청소년 대회 이후의 아쉬움은 나에게 항상 따라오는 질문이다. 나는 부상이 발목을 잡은 케이스"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혹사에 그의 발목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신 감독은 "관절이 다 닳아서 뼈와 뼈가 부딪히는 상태였다. 관절에 염증도 있었다"며 "우습게도 '격년제'로 활약한 선수였다. 1년을 뛰면 아파서 다음해는 활약이 저조했다. 그렇게 1년 정도 쉬면 또 그 다음해는 괜찮았다"고 말했다.
대학 졸업 이후 1987시즌 프로 무대에 데뷔한 그는 1994시즌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끝냈다. 32세의 이른 나이에 선수로서 그라운드를 떠난 것이다. 그는 "진작에 잘려야 했는데 운이 좋아 오래 했다(웃음). 아파서 잘 못 뛰는 상태로 1년을 보내면 잘려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감독님이 바뀌셨다. 새로 오신 감독님들은 나에게 기회를 한 번씩 더 주셨다"며 "아무래도 청소년 대표 시절 잘했던 선수니까 기대감이 있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선수 생활이 더 이어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스스로 '남들보다 일찍 은퇴했지만 운이 좋은 선수'라고 말한다. 조중연, 김호, 차범근 등 명지도자를 만나 배울 점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조금이나마 컴퓨터를 다루며 지도자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차범근 감독님 덕"이라며 "훌륭한 감독님들을 모셨기에 지금까지 현장에 있을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프로 무대에서도 지도자 생활을 했지만 그는 대학축구에서 장기간 활약했다. 호남대, 단국대, 고려대를 거치며 염기훈, 홍철, 나상호 등 다수의 선수를 배출했다. 그는 "앞으로 바랄 것 없다. 꼭 국가대표, 프로 선수를 키우는 것이 아닌 한국 축구를 탄탄하게 만들 기반으로 선수들을 성장시키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