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C는 ‘가장 흥미로운 선수’ 이정후 소개하는 자리”
놀라운 건 아직 MLB에 데뷔도 하지 않은 이정후(25·키움 히어로즈)가 그 리스트에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이정후는 외야수 세 자리에 마이크 트라웃(LA 에인절스), 무키 베츠(LA 다저스)와 함께 이름을 올렸다. 13명 중 MLB 이외의 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는 이정후가 유일하다.
#외야수는 이정후와 트라웃, 베츠
MLB닷컴은 이정후를 선정한 이유에 대해 "그는 2023시즌 종료 후 MLB에 진출할 예정이다. WBC는 이정후가 자신을 국제무대에 소개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며 "이정후는 WBC에 출전하는 외야수 중 최고의 선수는 아닐지 몰라도, 가장 흥미로운 선수는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또 지난 시즌 KBO리그 정규시즌 MVP와 타격 5관왕(타율·타점·안타·출루율·장타율)에 오른 이정후의 성적을 소개하면서 "이미 키움 구단의 해외 진출 허가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이정후가 이번 WBC에서 얼마나 주목 받고 있는지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심지어 후안 소토(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훌리오 로드리게스(시애틀 매리너스), 로날드 아쿠냐 주니어(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카일 터커(휴스턴 애스트로스), 세드릭 멀린스(볼티모어 오리올스) 등 MLB 정상급 외야수들이 이정후에게 베스트 멤버 한 자리를 내주고 '감투상(honorable mention)'으로 밀렸다. MLB닷컴은 지난 10일 한국 야구대표팀 최종 엔트리를 발표하면서 "이정후는 스즈키 이치로와 비슷한 플레이를 하는 선수다. 이번 WBC에서 한 단계 도약할 것 같다"며 "내년이면 그의 팀 동료가 될 지도 모르는 투수들과의 맞대결이 벌써 팬들을 열광하게 한다"고 기대하기도 했다.
이정후와 함께 외야수 부문 두 자리를 채운 트라우트와 베츠는 실력과 연봉 모두 MLB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간판 외야수다. 특히 트라웃은 야구 종주국이자 디펜딩 챔피언인 미국 WBC 대표팀의 주장을 맡고 있다. 그는 2012년 MLB에 데뷔한 뒤 11시즌 동안 총 10회(부상으로 53경기에 출전한 2020년만 제외)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2012년 아메리칸리그 올해의 신인으로 뽑혔고, 아메리칸리그 MVP로 3회(2014년, 2016년, 2019년) 선정됐다. 포지션별로 가장 타격 능력이 뛰어난 타자에게 주는 외야수 실버 슬러거상도 지난 시즌을 포함해 총 9번 받았다.
트라웃은 2019년 에인절스와 12년 총액 4억 2650만 달러에 계약해 연봉 3554만 달러(약 462억 원)를 받고 있다. 총액 기준으로 MLB 역대 1위 규모 계약이다. 연봉 역시 최근 애런 저지(뉴욕 양키스·9년 3억 6000만 달러)가 뛰어넘기 전까지는 MLB 타자 중 가장 많았다. 이번 대회가 트라웃의 첫 WBC 출전이라 팬들의 기대와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베츠 역시 2020년 다저스와 12년 총액 3억 6500만 달러에 사인한 특급 외야수다. 트라웃에 이어 MLB 역대 최고 규모 계약 2위에 올라 있다. 그는 2018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아메리칸리그 MVP에 오르면서 팀을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2020년 다저스로 이적한 뒤에도 팀 공헌도가 가장 높은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올스타로 6회(2016~2019년, 2021~2022년) 선정됐고, 공·수·주에서 모두 최정상급 실력을 뽐내는 대표적인 '5툴 플레이어'다. WBC 미국 대표팀에서도 리드오프를 맡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지난 시즌 베츠는 홈런 35개를 치고 OPS(출루율+장타율) 0.872을 기록하면서 내셔널리그 역대 한 시즌 최다 득점 타이인 117득점을 올렸다. 또 가장 수비 잘하는 선수에게 수여하는 골드글러브 상을 여섯 번째 수상했다. 트라웃과 함께 미국 대표팀 외야를 지킨다.
#보가츠와 마차도, 김하성의 동료들
WBC를 빛낼 베스트 내야진은 1루수 프레디 프리먼(다저스), 2루수 호세 알투베(휴스턴), 유격수 잰더 보가츠, 3루수 매니 마차도(이상 샌디에이고)로 구성됐다. 이 중 네덜란드 대표팀 야전사령관을 맡을 유격수 보가츠는 한국인 메이저리거 김하성(샌디에이고)과 얄궂은 인연이 있다. MLB 최정상급 유격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보가츠가 지난해 12월 샌디에이고와 11년 총액 2억 8000만 달러에 사인했기 때문이다.
김하성은 지난해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의 부상과 금지약물 복용으로 샌디에이고 주전 유격수를 맡았고, 시즌 종료 후 유격수 부문 골드글러브 후보에 오를 만큼 확실히 자리를 잡아가던 참이다. 그러나 공격력이 더 뛰어난 보가츠가 팀에 가세하면서 다시 유격수 자리를 내주고 2루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보가츠의 계약 이후 김하성의 트레이드설이 끊임없이 흘러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보가츠는 2013년 보스턴 레드삭스 소속으로 MLB에 데뷔한 뒤 10시즌 통산 1264경기에서 타율 0.292, 홈런 156개, 683타점을 기록했다. 보스턴 소속으로 2013년과 2018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했고, 올스타로 4회(2016, 2019, 2021~2022년) 선정됐다. 지난 시즌엔 150경기에서 타율 0.307, 홈런 15개, 73타점, OPS 0.833의 기록을 남겼다. 네덜란드는 지난 WBC에서 4강에 올랐다가 준결승에서 푸에르토리코에 져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보가츠를 앞세워 더 좋은 성적을 노린다.
3루수 마차도 역시 김하성의 팀 동료로 한국 야구팬에게 친숙하다. 그는 지난 시즌 내셔널리그 MVP 투표에서 폴 골드슈미트(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이어 2위에 오를 만큼 맹활약했다. 특히 시즌 막판 무서운 뒷심이 폭발했다. 8월 10일부터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타율 0.314, 홈런 13개, 출루율 0.376, 장타율 0.588을 기록하면서 샌디에이고의 극적인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었다. 또 지난해 MLB 최고 승률팀인 다저스와의 내셔널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도 타율 0.357과 홈런, 2루타로 펄펄 날아 89승의 샌디에이고가 111승 팀을 꺾고 24년 만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 진출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마차도는 이번 WBC에서 도미니카 공화국 강타선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그 역시 2017년 대회에 출전해 타율 0.269, 홈런 1개, 2루타 2개로 활약했고, WBC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도 남겼다. 아쉬운 건 마차도가 그 장면의 '주인공'이 아니라 '피해자'였다는 거다. 2013년 대회 우승팀인 도미니카공화국은 마차도가 소속된 샌디에이고의 홈 구장 펫코파크에서 2라운드 미국전을 치렀다. 익숙한 타석에 선 마차도는 2-4로 뒤진 7회 말 선두 타자로 나서 외야 멀리로 회심의 홈런성 타구를 날렸지만, 미국 중견수 애덤 존스가 펜스 위로 몸을 날려 잡아냈다. '마차도의 빼앗긴 홈런'으로 두고두고 화제가 된 장면이다. 결국 도미니카공화국은 4강 진출에 실패했고, 미국은 우승했다.
#프리먼과 알투베의 도전
1루수 프리먼은 캐나다 국기를 달고 두 번째 WBC에 나선다. 그는 미국 LA 오렌지카운티에서 태어나고 자란 뒤 애틀랜타와 다저스에서 선수 생활을 한 미국인이다. 그러나 WBC는 본인뿐 아니라 부모 중 한 명의 혈통에 따라 소속 국적을 선택할 수 있다. 프리먼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어머니 로즈마리 프리먼을 기리기 위해 WBC에 출전할 때만큼은 캐나다 유니폼을 입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프리먼이 10세였던 2000년 흑색종으로 세상을 떠났다.
프리먼은 2010년부터 2021년까지 12년간 애틀랜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했다. 통산 타율 0.295, 홈런 271개, 941타점을 올렸고, 2020년엔 내셔널리그 MVP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시즌을 앞두고 다저스와 6년 1억 6200만 달러에 계약해 고향팀 몸 담게 됐다. 다저스에서의 첫해인 지난 시즌에도 내셔널리그 출루율 1위(0.407)와 득점 1위(117득점)에 오르면서 리그 MVP 투표 4위를 기록했다.
2루수 알투베의 별명은 '작은 거인'이다. 공식 키가 168㎝(실제 키는 163㎝로 알려져 있다)로 MLB 선수 중 최단신이고, 운동선수가 아닌 일반인 남성 중에서도 작은 축에 속한다. 그럼에도 MLB 현역 최고의 2루수 중 한 명으로 꼽힐 만큼 천재적인 야구 재능을 뽐냈다. 카를로스 코레아, 알렉스 브레그먼, 조지 스프링어 등과 함께 21세기 휴스턴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선수이기도 하다. 다만 MLB 최악의 스캔들 중 하나였던 휴스턴의 '사인 훔치기' 논란에 휘말리면서 명예에 흠집이 나기도 했다. 코레아가 "나는 사인을 훔쳤지만, 알투베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옹호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소용 없었다.
한동안 주춤했던 알투베는 지난 2년간 다시 전성기 못지 않은 실력을 회복했다. 특히 지난 시즌에는 타율 0.300, 홈런 28개, 도루 18개를 해내면서 '사인 훔치기 없는' 휴스턴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탰다. 아메리칸리그 MVP에 올랐던 2017년 이후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알투베는 2017년에 이어 다시 한 번 베네수엘라 대표팀의 간판으로 WBC 그라운드를 밟는다.
#최고의 투수들과 포수는?
WBC 최고의 투수는 오른손·왼손 선발투수와 불펜 투수로 분류해서 선발했다. 오른손 선발 중 최고로 꼽힌 투수는 지난해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수상자인 샌디 알칸타라(마이애미 말린스)다. 그는 강력한 우승 후보인 도미니카공화국의 에이스다. 지난 시즌 MLB 전체 투수 중 가장 많은 228⅔이닝을 소화하면서 14승 9패, 평균자책점 2.28을 기록했다. 32경기 중 완투가 6번 포함됐고, 이닝당 출루허용(WHIP)이 0.980에 불과하다. 2019년부터 4년간 673⅔이닝을 던져 이 기간 최다 이닝을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왼손 선발투수로 뽑힌 훌리오 우리아스(다저스)도 알칸타라에 버금가는 이닝이터다. 지난 3년간 다저스에서 415⅔이닝을 책임지고 평균자책점 2.66, WHIP 1.01을 기록하면서 리그 최강의 선발투수 중 한 명으로 군림했다. 2020년 다저스의 월드시리즈 우승 주역이기도 하다. 지난해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투표에서 알칸타라에 밀려 3위에 오른 그는 처음으로 멕시코 국기를 달고 남미 야구 강국의 자존심 대결에 나선다.
불펜 투수로 뽑힌 에드윈 디아즈(뉴욕 메츠)는 지난해까지 2년 연속 32세이브를 올린 오른손 마무리 투수다. 특히 지난해 62이닝 동안 삼진 118개를 잡아 자신이 상대한 타자의 절반 이상(50.2%)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위력을 뽐냈다. 메츠는 시즌이 끝난 뒤 디아즈와 5년 1억 200만 달러에 재계약했다. 푸에르토리코 출신인 그는 2017년 WBC에서 4경기에 나서 2피안타 4볼넷 9탈삼진 2실점을 기록했다. 6년 만에 다시 고국 유니폼을 입고 WBC에 출격한다. 푸에르토리코가 지난 2회 대회 연속 결승까지 올랐다가 2위로 만족해야 했기에, 이번 대회에선 우승이 목표다.
포수는 미국 대표팀의 안방을 책임질 JT 리얼무토(필라델피아 필리스)가 이름을 올렸다. 명실상부한 현역 최고 포수로 꼽히는 그는 지난해 홈런 22개, 도루 21개를 해내 MLB 역사상 두 명뿐인 포수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했다. 도루저지율 44%에 달해 소속팀 필라델피아의 월드시리즈 진출에 큰 공을 세웠다. 리얼무토 역시 WBC에는 처음 출전한다.
#투타겸업과 지명타자, 베스트 선수는?
지명타자로는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토론토 블루제이스)가 최고의 선수로 꼽혔다. 한국인 빅리거 류현진과 한솥밥을 먹고 있는 그는 2021년 홈런 48개를 때려내면서 오타니 쇼헤이(에인절스)와 아메리칸리그 MVP를 다툴 만큼 괴물 같은 타격 재능을 뽐냈다. '괴수'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슈퍼 스타 아버지와 종종 비교되기도 했다. 지난 시즌엔 1년 전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홈런 32개와 OPS 0.819를 기록하면서 MLB 투수들이 두려워하는 거포로 자리매김했다. 2019년 MLB에 데뷔한 그는 이번 WBC가 첫 출전이다. 2013년 WBC 우승팀인 도미니카공화국의 중심타자로 나선다.
오타니는 경쟁자가 없는 '최고의 투타 겸업 선수'로 꼽혀 이 리스트에 유일무이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MLB닷컴 역시 "다른 포지션과 마찬가지로 '감투상'을 뽑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타니는 이 분야의 '유니콘'이다"라며 짐짓 난색을 표했다.
MLB에서 투수와 타자로 모두 최고의 기량을 뽐내고 있는 오타니는 말 그대로 '세상에 없던 선수'다. 오타니는 지난 시즌 타자로 홈런 34개를 때려내면서 투수로는 15승, 평균자책점 2.33, 탈삼진 219개를 기록했다. MLB 147년 역사 최초로 규정 이닝과 규정 타석을 동시에 채우면서 10승-30홈런과 200탈삼진-30홈런 기록을 최초로 작성했다.에이스와 4번 타자가 한 몸에 존재하는 셈이다. 오타니는 2009년 대회 우승팀이자 지난 대회 4강팀인 일본 대표팀에 '우승 청부사'로 합류한다. 오타니가 출전하면서 일본은 역대 최강의 대표팀을 꾸리게 됐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