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펜타닐에 동물성 마취제 자일라진 섞은 ‘초강력’ 마약 확산…워싱턴주 중독 사망자 2년 새 66% 폭증
워싱턴주 시애틀의 거리 한복판. 몸을 90도로 앞으로 숙인 채 비틀거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언가에 잔뜩 취한 듯 길바닥에 그대로 널브러져 있는 사람도 있다. 벤치나 휠체어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는 모두 약물에 취한 중독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워싱턴주의 마약 중독 사망자 수는 2년 전에 비해 66%가량 증가했을 정도로 현재 지역사회에서 가장 큰 골치 아픈 문제다. 전염병처럼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불법약물의 중심에는 펜타닐이 있다. 과거에는 약물 중독자들이 헤로인을 가장 선호했다면 지금은 펜타닐로 그 흐름이 바뀌었다.
시애틀 당국은 “길거리에서, 온라인에서, 또는 친구로부터 구입하는 모든 불법약물에 펜타닐이 포함돼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이 추세대로라면 앞으로 시애틀 거리에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마치 좀비처럼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시애틀 경찰 서부지국장인 스티브 스트랜드는 ‘시애틀타임스’ 인터뷰에서 “이 동네에서 운전을 하고 돌아다니면 펜타닐에 중독된 채 제대로 서있지 못하거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허리를 굽히고 있는 사람들을 여럿 볼 수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15분 후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보면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다닌다. 그리고 나서 다시 다음 약물을 찾곤 한다”며 씁쓸해 했다.
사정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워싱턴주 전역에서 영안실과 화장터의 빈자리가 부족해졌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킹카운티 검시관실 관계자들에 따르면, 펜타닐 사태가 악화되면서 약물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끝없이 밀려들고 있다. 파이살 칸 박사는 “2022년 말 상황이 얼마나 나빴는지, 그리고 2023년에는 얼마나 더 악화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지표인 펜타닐 관련 사망자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때문에 검시관실은 현재 시신 보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미 올해 들어 처음 3주 동안 킹카운티에서는 35명의 약물 과다복용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이 가운데 펜타닐로 인한 사망자는 절반이 넘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 미국 전역에서 보고된 약물 중독 사망자는 10만 7000명에 달해 전년 대비 44% 증가했으며, 이는 총기 및 자동차 사고 사망자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였다. 이 가운데 펜타닐이 주된 원인이 된 사례는 약 3분의 2에 달했다. 유명인들의 펜타닐 과다복용 사례로는 2018년 사망한 래퍼 맥밀러와 2016년 사망한 팝가수 프린스 등이 있다.
약물에 취한 좀비들이 점령해버린 다운타운이 점차 슬럼화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얼마 전 시애틀의 6번가 모퉁이에 있는 나이키 플래그십 스토어와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철수를 결정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나이키 측은 26년 이상 운영해온 매장을 갑자기 폐쇄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지역 주민들은 시애틀타임스에 “길거리 범죄가 아마 가장 큰 이유이지 않겠느냐”며 추측하고 있다.
미국 전역을 불안에 떨게 만들고 있는 펜타닐은 대체 어떤 약물일까. 펜타닐은 1959년 암 환자에게 투여하는 진통제로 처음 개발됐다. 보통 주사기로 약물을 투여하거나 패치 형태로 부착해서 사용한다. 마약단속국(DEA)에 따르면 2010년대 들어서는 알약 형태로 점점 더 많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펜타닐의 가장 큰 특징은 값싼 가격과 강력한 효과에 있다. 헤로인을 제치고 시애틀의 대표적인 길거리 마약이 된 이유 역시 저렴한 가격 때문이었다. 요컨대 몇천 달러에 구입한 분말 형태의 펜타닐 1kg으로 수백만 달러 가치의 알약 수십만 개를 생산할 수 있다. 현재 미국에서 불법 판매되고 있는 펜타닐 알약의 가격은 개당 2~3달러(약 2600~3800원) 정도며, 이 가격마저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다.
크기가 작다는 점도 펜타닐 중독자가 빠른 속도로 늘고 있는 이유다. 그만큼 국경을 넘어 밀반입하는 것이 쉬워졌다는 의미다. 미국 세관국경보호국(CBP)이 지난해 압수한 펜타닐은 매달 360kg가량에 달했으며, 이는 2020년에 압수한 양의 두 배에 해당한다. 펜타닐은 일반적으로 지속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 헤로인, 코카인, 필로폰과 같은 약물과 섞어 알약으로 만들어지며, 이렇게 만든 알록달록한 사탕처럼 생긴 ‘레인보우 펜타닐’은 특히 10대들과 젊은층을 대상으로 소셜미디어(SNS)에서 판매되는 경우가 많아 더욱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펜타닐의 강력한 효과도 문제다. 2mg(연필심 끝부분에 묻는 양)의 아주 적은 양으로도 모르핀보다 최대 100배나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치명적이 될 수 있다. 다만 헤로인보다 효과는 강력하지만 20분 정도만 지속되기 때문에 중독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에 30~40회가량 투약하는 경우가 많다.
펜타닐 중독이 더욱 심각한 이유는 최근 들어 가장 골치 아픈 약물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자일라진 때문이다. ‘트랭크’라고도 불리는 자일라진은 동물용 진정제(마취제)로, FDA에 의해 승인된 약물인 만큼 온라인을 통해 쉽게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펜타닐과 혼합해서 인체에 사용할 경우다. 자일라진을 펜타닐과 섞는 이유는 펜타닐의 가장 큰 단점인 짧은 지속시간을 늘리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경우 끔찍한 결과가 초래된다. 자일라진과 혼합한 펜타닐을 투여할 경우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걸어다니거나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등 이른바 ‘좀비’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트랭크’ 과다복용은 약물 오남용 치료에 사용되는 길항제인 날록손을 투여해도 치료가 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
부작용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주사 부위에 피부염이나 종기가 발생해 피부조직이 썩어들어가는가 하면 근육의 감각이 마비되어 몇 시간씩 기절해 있는 경우도 다반사다. 심각한 경우에는 손가락이나 발가락, 팔다리 혹은 손발을 절단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실제 필라델피아의 응급실에서는 지난 3년간 피부와 연조직 부상 환자가 네 배나 증가했다.
현재 미국에서 자일라진으로 사망하는 중독 환자들은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미국 10개 도시에서 실시된 약물 및 알코올 의존성 연구에 따르면 2015년만 해도 자일라진은 전체 치명적인 약물 과다복용 사례에서 0.36%에 불과했다. 그러나 2020년까지 그 수는 6.7%로 치솟았으며, 이 가운데 2019년에만 31%가 급증한 필라델피아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미시간주의 경우에는 2019년 이후 최소 200명의 자일라진 관련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2020년 코네티컷주 약물 과다복용 사망자의 최소 10%가, 2021년 메릴랜드주의 약물 과다복용 사망자의 19%가 자일라진 관련 사망자였다.
캘리포니아대학의 조셉 프리드먼은 “펜타닐이 10년 전에 퍼지기 시작한 것처럼 지금은 자일라진 중독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10년 전 이맘때 우리는 펜타닐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바라건대 이번에는 더 잘 대응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따라서 지역별로 약물중독 문제를 해결하고 예방하기 위한 노력도 이뤄지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인 개빈 뉴섬은 펜타닐 중독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9700만 달러(약 1250억 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이에 대해 그는 “이것은 우리의 최우선 과제다. 펜타닐 위기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는 없다”며 경각심을 일깨웠다. 또한 모든 학교에 약물중독에 대비한 해독제를 구비하도록 지시했다.
그런가 하면 2022년 샌프란시스코 에이즈재단은 샌프란시스코 공중보건부(SFDPH)와 협력해 4만 회 분량의 날록손을 지역사회에 배포했으며, 그 결과 5127건의 치료 효과를 보았다. 보스턴 검찰청은 2016년 ‘뉴잉글랜드 펜타닐 특별팀’을 결성해 매사추세츠 거리의 불법 약물 판매자들을 추적 및 체포하고 있다. 지금까지 특별팀이 체포한 용의자들은 580명 이상이며, 이 과정에서 439kg이 넘는 헤로인과 펜타닐을 압수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백신 개발에도 기대를 걸고 있다. 텍사스에 위치한 휴스턴대학의 연구원들은 펜타닐의 효과를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백신을 개발하는 데 성공해 주목을 받았다. 백신을 접종할 경우 잠재적으로 매년 수천 명의 미국인들을 약물 과다복용에서 구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연구를 이끈 콜린 헤일 박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펜타닐에 노출될 위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특히 유용할 전망이다. 무엇보다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기 전에 백신을 맞도록 하는 부모들도 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