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과 협업·투자 받는 과정 유출 사례 빈번…“양측 분쟁은 기울어진 운동장, 손배액 현실화 필요”
LG그룹 첫 공채 여성 CEO(최고경영자) 이정애 신임 LG생활건강(LG생건) 대표이사 사장이 올 초 신년사에서 한 말이다. 새해 LG생건이 처음 선보인 ‘특색 있는’ 시도는 ‘뷰티테크’다. LG생건은 국내 화장품 업계 최초로 ICT(정보통신기술) 모바일 산업 분야 세계 최대 박람회인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에 참가해 휴대용 타투 프린터 ‘임프린투(IMPRINTU)’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이 제품이 한 스타트업 제품의 콘셉트와 기술을 베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국내 스타트업 프링커코리아는 LG생활건강이 MWC에서 공개한 휴대용 타투 프린터가 자사의 ‘프링커(Prinker)’를 모방했다며 LG생활건강에 공정거래법 및 부정경쟁방지법 저촉 소명을 요청하는 내용 증명을 발송했다. 또 중소벤처기업부가 소관하는 중소기업 기술보호울타리 피해구제에 사건을 접수하고 조사관 파견을 요청했다.
앞서 지난 1월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박람회인 ‘CES2023’에서 롯데헬스케어가 선보인 영양제 디스펜서 ‘필키’도 국내 스타트업 제품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대기업이 내놓은 신제품이 잇따라 국내 스타트업 제품을 표절했다는 의혹에 휩싸이고 있다. 자금력 부족으로 대기업의 도움이 필요한 스타트업이 협업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사례가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또 현행법상 기술침해의 입증 책임이 침해를 주장하는 쪽에 있고, 배상액도 실효성이 떨어져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프링커코리아가 LG생건이 자사 제품을 베낀 것이라 주장한 타투프린터는 블루투스로 모바일 앱과 기기를 연결해 화장품 잉크로 피부에 타투를 그리는 제품이다. 피부에 영구적으로 남지 않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지워진다. 프링커코리아(옛 스케치온)는 삼성전자 C-Lab(사내 벤처 육성프로그램) 출신의 국내 스타트업으로 2018년 타투프린터 1세대 모델 프링커프로를 출시했다. 프링커코리아에 따르면 2019년 1월 LG생건 디자인팀은 프링커코리아에 협업 가능 여부와 공동개발 등을 처음 문의했다. 이후 6월 양사는 2022년 6월까지 유효한 비밀유지계약(NDA)을 체결했다.
NDA 체결 이후 양사 간 소통이 중단됐다. 2020년 1월 프링커코리아가 출시한 ‘프링커S’를 LG생건이 구매했고 LG생건 직원이 프링커 서비스 등록‧기기 등록을 한 점도 모방 정황이라고 프링커 측은 주장한다. 이어 LG생건이 같은 해 9월 타투 프린터라는 이름으로 디자인 특허를 등록했다. 이에 대해 LG생건은 “신규 시장에 진입하기 이전에 다양한 제품을 모니터링하는 기업의 일상적인 활동”이라고 해명했다.
LG생건은 프링커코리아와 업무 협력이 아닌 자체 개발과 연구로 임프린투를 출시했다는 입장이다. LG생건은 입장 자료를 내고 “LG전자와 기술용역개발 계약을 체결하고 직접 기술 연구를 시도하기도 했다”며 “2022년에는 세계적인 잉크 카트리지 회사인 HP와 협업했고 기술 연구 끝에 LG생활건강의 미니 타투 프린터 ‘임프린투’를 개발하게 됐다”고 밝혔다.
윤태식 프링커코리아 대표는 “LG가 윤리경영‧정도경영을 얘기하는데 과연 이 같은 기업윤리에 맞지 않은 비정상적 방법의 접근 및 모방 프로젝트가 이에 부합하는 것인가”라며 “전형적인 ‘대기업의 스타트업 베끼기’의 또 다른 피해 사례로, 법적‧제도적 대응을 강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LG생활건강은 법률대리인을 통해 프링커코리아에 내용증명을 보내고 “타투 프린터의 개념은 고유 또는 독점적인 제품‧기술이 아니다”라며 “허위사실 유포에 대해 충분한 해명과 시정조치, 사과를 요구하며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민·형사상 법적 조치를 통해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중소기업은 자금력과 홍보력 부족으로 기술 개발에 성공했더라도 투자를 받거나 대기업과 협력해야 할 일이 많다. 그 과정에서 아이디어나 기술을 도용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지적재산권법 전문 변호사인 최유나 법률사무소 가까이 대표변호사는 “대기업이 사전에 관련된 정보를 요구하거나 논의 단계에서 공유한 영업 비밀을 업무에 활용하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NDA(비밀유지계약) 협약서를 체결해야 한다”며 “그러나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NDA 체결을 요구하기도 어렵고 썼더라도 기한이나 내용 등을 요구하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 분쟁은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에 중소기업들이 적절히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최유나 변호사는 “분쟁이 발생하면 자금이나 정보력 부족으로 중소기업 측에서 대응을 포기하거나 소송을 아예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소송이 진행되기 전에 합의금을 주고 고소를 취하하게 하거나 중도에 포기시키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소송으로 간다고 해도 중소기업의 승소율은 높지 않다. 지난해 특허청 자료에 따르면 2018~2021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분쟁에서 특허 관련 중소기업의 패소율은 2018년 50.0%, 2019년 60.0%, 2020년 71.4%, 2021년 75%로 매년 증가했다.
기술 탈취나 도용 등의 침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책임이 피해를 주장하는 쪽에 있기 때문에 침해 사실을 인정받는 것이 쉽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윤태식 대표는 “증거는 전부 가해자 쪽에 있는데 소송에 이기려면 피해자가 입증해야 한다”며 “피해자에게 가해자가 어떤 피해를 입혔는지 논리적으로 입증하고 가해자가 저지른 범죄 증거를 가져오라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침해를 인정받는다 해도 손해배상액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지적도 있다.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상생협력법)은 수·위탁거래에서 발생하는 중소기업 기술자료의 부당 사용 행위 등에 대해 최대 3배까지 손해배상을 물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김건형 특허법률사무소 태리 대표변리사는 “침해제품을 팔아서 얻는 이익이 침해 손해배상액보다 현저히 많기 때문에 배짱으로 사업을 진행하게 될 수 있는 것”이라며 “자본력을 앞세운 대기업이 적극적인 마케팅과 신속한 제품 양산을 하게 되면 시장 점유율은 안 봐도 뻔한 것”이라 지적했다.
중소벤처기업부 관계자는 “이번 타투프린터와 관련해서는 법률 침해 여부를 단정하기 이르지만 피해 정황이 있어 보이는 상황”이라며 “조정제도 등을 안내하고 협의점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또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탈취는 대표적인 불공정행위로 이를 근절하기 위해 국정과제로 정해 중점 추진하고 있다”며 “기술분쟁 조정제도의 신뢰성 제고 및 기술유용행위에 대한 금지 청구권 도입 등을 추진해 중소기업의 피해를 실질적으로 구제하겠다”고 덧붙였다.
김정아 기자 ja.k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