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개정 통해 옥외광고물법 적용 대상서 제외…도시 미관 해치고 행인 안전 위협하는 등 부작용 속출
2022년 12월부터 전국 거리엔 정치권 핫이슈 관련 구호가 담긴 정당 현수막이 무차별적으로 걸리기 시작했다. 현직 국회의원들이 지역구 성과를 나열한 현수막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지역 당협위원장들이 내건 현수막도 곳곳에 걸려 있다. 현직 대통령을 친일파 이완용에 빗대거나 제1야당 대표 구속을 요구하는 등 특정 정치인을 겨냥한 강경한 정치구호를 담은 현수막도 많았다.
정당 현수막은 정당법에 따라 정당 정책·정치구호 등을 알리는 옥외광고물이다. 통상적으로 국고보조금이나 정치후원금으로 제작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수막 하나를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은 10만 원 정도다.
불편함을 호소하는 시민들도 많아졌다. 정당 현수막이 일부 자영업자 사업장을 가리는 것과 관련해 항의가 속출했다. 유동인구가 많은 네거리엔 정당 현수막이 시민들 이동 경로를 가로막는 경우도 있었다. 안전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현수막을 고정하는 줄이 성인 남성 목 높이까지 내려와 진로를 방해했다는 경험담도 나왔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40대 남성 김 아무개 씨는 “얼마 전 출근길에 현수막 줄에 부딪혀 넘어질 뻔했다”면서 “횡단보도에서 인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갑자기 눈앞에 현수막 줄이 보여 당황했다”고 했다. 김 씨는 “불과 얼마 전부터 거리에 정치 관련 현수막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기분”이라면서 “각 정당의 편향적 메시지가 불편함을 유발할 뿐 아니라 안전 문제도 있는 것 같아 불쾌했다”고 지적했다.
경기도 자영업자 50대 남성 정 아무개 씨는 “새해를 맞이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당) 현수막이 가게 간판을 가려 구청에 문의해봤더니 ‘철거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답했다”면서 “뉴스에선 날마다 정치인들이 민생을 외친다. 그런데 현실에선 정치인들이 내건 현수막이 민생을 방해하는 부분이 피부에 와 닿는다”고 하소연했다.
거리 곳곳에 정당 현수막이 늘어난 것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2022년 12월 11일부터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시행된 것을 근거로 정당 현수막이 거리 곳곳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이 개정안 핵심 내용은 정당 현수막 설치에 대한 특례를 부여하는 데 있다. 정당 현수막에 대해 허가·신고 및 금지·제한 등 요소에 특례를 준다는 내용이다. 통상적으로 보장받는 정당 정책 및 활동 관련 현수막을 설치할 경우엔 옥외광고물법 규제 조항에 해당되지 않게끔 특혜가 주어졌다.
이 개정안은 3차례에 걸쳐 발의된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공포됐다. 2020년 7월 24일 김민철 더불어민주당 의원(경기 의정부을) 등 19명이 개정안을 발의했다. 2020년 12월 31일엔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서울 중랑갑) 등 10명이 개정안을 다시 발의했다. 2021년 3월 9일엔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경기 안산단원을) 등 10명이 개정안을 발의했다.
2022년 5월 4일 앞서 언급한 개정안 3건을 통합·조정한 위원회 안이 제안됐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2022년 5월 16일 위원회 안을 본회의 안건으로 상정하기로 했다. 2022년 5월 29일엔 제397회 국회(임시회) 제4차 본회의가 열렸다. 이날 본회의에서 국회 행정안전위원장인 서영교 의원은 옥외광고물법 개정안과 관련해 “옥외광고물법에 의해 정당 현수막이 제거돼 왔다”면서 “이제 정당 현수막(을 설치하는 것)은 법으로 보장받게 되는 그런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은 전자투표를 거쳐 가결됐다.
재석 의원 227명 중 204명이 해당 개정안에 대해 찬성표를 던졌다. 반대는 9명, 기권이 13명이었다. 반대표를 던진 의원 9명은 모두 국민의힘 소속이었다. 기권표 13표는 국민의힘 의원 10명, 더불어민주당 의원 3명 분포를 보였다.
반대·기권표 정당 분포와 관련해 한 야권 관계자는 “아무래도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발의한 의안이다 보니 국민의힘에서 반사적인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이 존재했던 것”이라면서 “이 정도 찬성 비율이면 대다수 의원들이 법안에 큰 이견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풀이된다”고 분석했다.
정당 현수막 관련 개정안을 두고 여야 대화합이 이뤄진 셈이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정의당, 기본소득당 및 무소속 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렇게 국회가 정치권에 ‘셀프 특혜’를 주는 법안은 사실상 프리패스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원안 가결된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은 2022년 5월 29일 정부로 이송됐다. 정부는 2022년 6월 10일 공포했다. 정부가 법 개정안을 공포한 지 6개월이 지난 2022년 12월 11일부터 법이 시행됐다. 정당 현수막에 대한 특례가 주어지기 시작한 시점이다.
개정안 취지는 정당법과 옥외광고물법 사이 모순점에 대한 교통정리였다. 기존 지자체가 옥외광고물법을 근거로 정당 현수막을 단속해 철거하는 것을 막아 정당활동에 대한 안정성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이다. 특례가 주어지기 시작하면서 정당 현수막은 옥외광고물법 규제 범위에서 벗어났다. 허가를 받거나 신고를 할 필요도 없이 현수막을 게시할 수 있고, 금지·제한 요소를 적용받지 않는다.
특례 조항이 신설됐지만, 지켜야 할 요소도 분명히 있다. 옥외광고물법 시행령 제35조의 2에 따르면 정당의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을 표시하는 현수막의 경우엔 정당 명칭, 정당 연락처, 설치 업체 연락처를 표기해야 한다. 현수막 표시 기한은 15일이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서울시내 설치된 정당 연락처와 설치 업체 연락처가 함께 기재된 현수막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협위원회 주관 행사 개최 관련 현수막이나 당원 모집 현수막 등엔 담당자 연락처가 기재돼 있었다. 그러나 설치업체 연락처가 기재된 경우는 드물었다.
정치권 내부에선 현수막 게시가 경쟁적으로 이뤄지면서 그 불편이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향하고 있다는 자성론이 나온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국회에서 처리한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시민들에게 큰 불편을 주고 있다”면서 “정당정치 명분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해당 법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킨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정치권이 공개적으로 게시하는 현수막에 대해 ‘불철거 특권’을 부여한 셈”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옥외광고물법 개정이 이뤄진 이유로는 ‘단속의 모호성’이 언급됐다”면서 “지방자치단체별로 정당 광고물을 단속해 철거하는 것에 대한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면서 법 개정을 논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정당 현수막 자체를 통상적 정당활동으로 규정하며 철거되지 않게끔 세팅한 셈”이라면서 “이젠 오히려 정당 현수막이 형평성 논란 중심에 떠오를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정치권 또 다른 관계자는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온 거리에 정치 구호들이 난무하고 있다”면서 “일부 시민들은 무질서하게 게시된 현수막을 보고 ‘흉물’이라고 부를 정도”라고 비판했다. 이 관계자는 “정치권이 입버릇처럼 민생을 외치는 상황에서 경쟁적으로 게시된 현수막이 자영업자 업장을 가리는 웃지 못 할 해프닝도 벌어지고 있다”면서 “이번 법 개정안 시행 과정을 살펴보면 국회의원들에겐 민생보다 정치가 먼저인 것처럼 비친다”고 지적했다.
일부 지자체에선 ‘현수막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서울시는 25개 자치구 의견을 수렴해 정당 현수막 수량과 설치장소 제한 등 내용을 담은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을 건의할 계획이다. 인천시는 시장이 직접 나서 정당 현수막이 난립하는 상황을 강하게 비판했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3월 13일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시민 짜증 유발하는 정치공해를 막아내겠다”면서 “정당 현수막은 정치인만의 무차별적 특권이며, 무분별한 과잉정치로 정치혐오를 불러일으킨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당 현수막을 “국민이 부담하는 국고보조금과 정치후원금을 홍보로 사용하는 부당한 지출이자 세금 낭비”라고 규정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