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은행 안정적이만 부동산PF 뇌관 가능성…금리 상승 억제로 비트코인 수혜 전망
글로벌 경제의 화두도 인플레이션과 긴축에서 금융시스템의 안정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지고 있다. 연준이 다시 빅스텝(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에 나설 가능성은 낮아졌다. 급락했던 주요 은행주들이 반등하면서 일단 증시는 진정됐지만 가파른 긴축이 남긴 상처 탓에 금융시스템의 어딘가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불안은 떨치지 못하는 모습이다. 연준의 추가 긴축이 주춤해져도 증시의 의미 있는 반등은 어렵게 됐다. 달러를 발행하는 미국 금융시스템의 불안은 위험자산 선호를 떨어뜨릴 수 있다.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 긴급진화 한 까닭
SVB는 연준의 긴축으로 금리가 오르는 와중에도 긴축 중단을 기대하며 오히려 채권 비중을 높였다. 하지만 연준은 오히려 기준금리를 더 올릴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채권 금리는 더 올랐다. 채권 금리 상승은 채권 가격 하락이다. SVB는 채권금리 변동에 대한 위험관리(Hedge)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이는 채권 평가손실을 키워 SVB 경영에 대한 불안을 키웠고 결국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Bank run)로 이어졌다.
예금 인출에 대응하려면 현금이 충분해야 한다. SVB가 보유한 채권은 대부분 만기가 길었다. 만기 전에 급히 팔면 손실을 봐야 한다. 이는 채권매매 손실로 이어져 경영을 더 악화시킨다. 이 때문에 예금 인출 수요에 대비해 현금화가 쉬운 단기채권과 장기채권을 적절히 나눠 보유하는 게 보통이다. SVB는 이 같은 만기 관리도 소홀했다. 현금이 부족해 예금 인출이 어려울 것이란 불안은 예금주들이 인출을 더 서두르게 자극했다. SNS(소셜미디어) 등으로 불안은 빠르게 확산됐고 순식간에 모바일 뱅킹으로 대규모 인출이 이뤄졌다.
미국 정부는 금융시장이 열리기 전에 SVB의 파산을 결정한다. 대신 연방예금보호기구(FDIC)와 연준이 예금의 전액 보장과 은행 보유 국채∙주택저당채권(Mortgage)을 담보로 한 대출을 약속했다. 예금보호한도(25만 달러)를 넘어서는 이례적 보장이다. 연준이 긴축 와중에 되레 시중에 돈을 더 풀 수 있다는 자기모순적 선택이다. SVB에 이어 시그니처은행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하자 뱅크런이 다른 은행들로 번질 가능성을 경계한 조치다. 긴급 조치로 대규모 인출 사태는 일단 진정이 됐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지방·특수은행에 대한 불안으로 더 큰 은행으로 예금을 옮기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SVB와 비슷한 문제를 가진 은행들이 더 있을 수 있다는 불안이 여전하다는 뜻이다. 미국에서는 은행 경영진의 잘못과 함께 이를 막지 못한 중앙은행과 정부의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다.
금융시스템에서 자금중개기능을 수행하는 은행에 문제가 생기면 경제 전반에 엄청난 위협이 된다. 예금 인출이나 이동이 대규모로 이뤄지면 은행들은 채권 등 보유자산을 팔아 현금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채권가격 하락으로 이어져 시중 금리를 끌어 올릴 수 있다. 시장에 현금 수요가 급증하면 단기 자금시장이 경색된다. 금리 상승과 자금시장 경색은 기업들에 치명적이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서 유동성 문제가 발생했다. 미국이 이례적 조치로도 모자라 바이든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국민들의 불안을 진정시키려 안간힘을 쓴 이유다. 연준도 기준금리 결정 회의에서 추가 긴축 폭을 최소화할 전망이다. 이런 와중에 연준이 기준금리를 가파르게 올리면 은행들의 채권 손실을 더 키워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모양이 된다.
#미국과는 다르지만…우리나라는 부동산PF가 문제
SVB 사태로 전 세계적으로 금융회사의 건전성과 유동성 관리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됐다. 국내의 경우 SVB와 같은 문제가 은행에서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 미국 은행들은 대출을 한 후 이를 채권 형태로 만들어 시장에 판다. 그리고 채권을 판 돈으로 유가증권 등 다른 자산에 투자한다. 이들 자산은 시가로 평가된다. 금리 변화에 따라 가격이 달라져 장부에 손익을 반영해야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은행들이 대출 자체를 직접 보유한다. 유가증권 등 가격이 변동하는 자산은 많이 갖고 있지 않다. 금리가 움직여도 은행 손익에 직접적인 영향이 적다. 게다가 은행 대출은 대부분 보증과 담보라는 안전장치를 갖췄다. 신용대출도 고신용자들에게만 해준다. 가장 비중이 큰 주택담보대출은 평균 담보인정비율이 70%도 안 된다. 원리금 상환에 연체가 발생할 수는 있지만 담보 가치가 30% 이상 폭락하지 않는 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지 않는다. 금리변동으로 SVB와 같은 유형의 뱅크런이 국내에서도 발생할 가능성은 아주 낮다.
하지만 은행이 아닌 금융회사에 유동성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상당하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투자와 대출을 많이 한 증권사와 저축은행이 가장 약한 고리다. PF 자산이 제대로 팔리지 못해 증권사와 저축은행의 투자∙대출금 회수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다. 부실이 커지면 증권사는 자금조달이 막히고 저축은행은 예금이 이탈할 수 있다. 2012년 겪었던 저축은행 사태와 비슷한 구조다.
지난해 9월 말 기준 전 금융권의 부동산 PF 대출은 125조 3000억 원에 달한다. 증권사의 부동산 PF 채무보증 24조 1000억 원을 더하면 150조 원 수준이다. 한국은행은 최근 발간한 3월 통화신용정책 보고서에서 일부 사업의 지연 및 중단이 불가피하며 미분양 재고도 점차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증권사, 저축은행 등 비은행 금융회사가 타격을 입을 것으로 내다봤다.
예금자보호법으로 보호되는 원리금 합계 5000만 원을 넘는 예금의 비율은 은행의 경우 2017년 61.8%(724조 3000억 원)에서 2022년 6월 기준 65.7%(1152조 7000억 원)로 높아졌다. 저축은행도 이 기간 10.7%(5조 4000억 원)에서 16.4%(16조 5000억 원)로 상승했다. 위험을 줄이려면 23년째 그대로인 예금자보호한도를 늘려야 한다. 대통령령을 개정하면 가능하지만 그만큼 예금자보험료 부담이 높아질 수 있어 반대 목소리도 적지 않다. 현재 국회엔 예금자 보호 한도를 1억 원으로 상향하는 내용 등의 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다. 금융시장 충격 등으로 일시적으로 자금난에 처한 금융회사에 예보가 선제적으로 유동성 지원을 하는 금융안정계정 도입안도 현재 관련 법안이 상정돼 있다.
#증시 영향은 제한적…비트코인 주목 받을 수도
미국의 뱅크런이 진정되면서 이번 사태가 우리 증시에 미치는 영향은 당장은 크지 않을 전망이다. 연준의 긴축 강도가 약해지면 달러 강세가 진정되며 최근 급등한 원·달러 환율이 안정되는 효과가 기대된다. 다만 은행에 대한 불안 요인은 아직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미국의 중소형 은행들 상당수가 국채 금리 급등으로 장부상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국채를 보유한 금융회사는 은행뿐 아니다. 금융시스템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또 드러날 수 있다. 금융시스템에 대한 불안은 안전자산 선호현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위험자산인 주식,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신흥국 주식시장에서는 외국인 자금 이탈 요인이 된다.
비트코인이 뜻밖의 수혜를 입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비트코인 가격을 짓눌렀던 금리 상승이 주춤해질 수 있어서다. SVB 폐쇄 결정이 내려진 지난 10일 2만 달러선이던 비트코인 가격은 4일 만에 30% 가까이 뛰어올랐다. 은행 파산 등 전통 화폐 시장이 큰 혼란을 겪으면서 가상자산의 대장 격인 비트코인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