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고아 폭격으로부터 구조” 내세워 수천~1만 명 본토 이송…국제형사재판소, 푸틴 대통령 체포영장 발부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아마 힘없는 어린아이들일 것이다. 러시아에 대항해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어린이들 역시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 당국이 우크라이나의 아동들을 비밀리에 러시아 본토로 이송해 강제 입양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국제사회에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최근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상대로 발부한 체포 영장에 적시되어 있는 ‘아동 불법 이주’에 대한 항목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이를 가리켜 ‘조용한 전쟁 범죄’라고 일컬은 독일 시사 주간 ‘슈테른’은 최근 ‘사라진 아이들’이란 르포를 통해 행방이 묘연해진 우크라이나 아동들의 실태를 고발했다.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 외곽에서 보육원을 운영하는 볼로디미르 사하즈닥은 흰 수염을 기른 친절한 원장이다. 1년 전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50명 남짓한 아이들이 해맑게 뛰어놀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서 모든 게 바뀌고 말았다.
러시아군이 헤르손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위험을 감지한 그는 재빨리 조치를 취했다. 무엇보다 빨리 아이들을 숨겨야 했다. 그는 ‘슈테른’에 “우크라이나는 사실상 8년 전부터 러시아와 전쟁 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위험 상황이란 걸 재빨리 알아챘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어린이집 홈페이지를 삭제한 후 SNS(소셜미디어)에서도 관련 정보를 모두 지워버린 그는 아이들과 함께 지하실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수개월 동안 공포스런 날들이 이어졌다. 필요한 경우 아이들은 반드시 짝을 이뤄 뒷마당에서만 놀도록 했다. 자원봉사자들이 몰래 가져다주는 생필품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던 사하즈닥은 “러시아군은 우리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웃들도 전혀 몰랐다”며 안도했다.
그러나 이런 은닉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른 지역에서 지하실에 숨어있던 아이들이 발각됐다는 소식이 속속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즉시 직원들을 불러모았다. 시간이 없었다. 사하즈닥은 “그들이 우리 아이들을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다. 아이들을 각자의 집에, 가족들 사이에 몰래 숨겨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에 한 여성은 무려 다섯 명의 아이를 맡기도 했다. 그렇게 결국 나이 많은 고학년 아이들만 보육원에 남게 됐다.
며칠 후 버스 한 대가 보육원 앞에 멈춰섰다. 러시아군이었다. 사하즈닥은 “그들은 우리가 이제부터는 러시아 정부 방침에 따라 일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문서와 하드디스크를 모두 압수해갔다”고 말했다. 며칠 후 한 무리의 기자들과 함께 다시 나타난 군인들은 이번에는 “언론 보도에 따르면 당신은 아이들에게 러시아를 비방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면서 강제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겠다고 통보했다.
아이들이 버스를 타고 떠나가는 모습을 힘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사하즈닥은 “내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을 숨길 수가 없었다. 다른 곳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며 절망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아이들은 크름반도로 이송됐으며, 그곳에서 위탁가정에 입양되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얼마나 많은 우크라이나 아동들이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보내졌는지는 정확히 집계되지 않고 있다. 다만 러시아 측은 수천 명, 우크라이나 측은 1만 명가량이라는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 가리켜 명백한 전쟁 범죄라고 규정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리 아이들을 되찾아올 수 있도록 전 세계에 강력한 지원을 호소하는 바이다”라며 국제사회의 지지를 촉구했다. 아날레나 베르보크 독일 외무장관 역시 “이 아이들은 유괴당했다”고 규탄했다.
반면 러시아 측은 이런 주장이 모두 터무니없다며 맞서고 있다. 아이들을 러시아로 이주시킨 건 맞지만 이는 전쟁고아가 된 아이들을 구조해 의료 처치를 해주거나 온전한 가정에 입양시켜주기 때문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며 당당한 입장이다. 요컨대 ‘납치’가 아닌 ‘대피’라는 의미다.
일례로 지난해 4월 한 달 동안에만 돈바스 일대에서는 약 2000명의 우크라이나 전쟁 고아들이 러시아로 이주했다. 또한 러시아 크라스노다르 아동복지국은 지난해 8월, 마리우폴에서 1000명이 넘는 고아들을 구조해 새 부모들에게 연결해주었다고 선전했다.
문제는 이렇게 강제 이주된 아이들이 모두 고아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전쟁통에 잠시 부모를 잃은 경우도 많았다. 우크라이나 인권위원회는 “우리는 이주된 아이들의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 이 가운데는 친척이나 지인에 의해 실종신고된 아이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고 주장했다.
인권단체인 ‘국제엠네스티’가 소개한 한 11세 아동의 사연도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부상을 입고 도네츠크의 병원에 홀로 입원해 있었던 소년은 고아라는 러시아 측의 주장과 달리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 엄마는 전쟁 포로로 구금된 상태였다. 결국 국제단체의 도움으로 페이스북을 통해 할머니를 찾은 소년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숨겨준 것은 사하즈닥만이 아니었다. 헤르손 중심가에 위치한 ‘작은 종’ 보육원 역시 러시아군의 눈을 피해 46명의 아이들을 교회 지하실에 숨겼다가 낭패를 보고 말았다. 당시 어린이집을 후원하고 있던 파블 스몰랴코브 목사는 “전쟁 발발 초기에는 폭격을 피해 아이들을 대피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말하면서 “그럼에도 곧 아이들이 납치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그래서 아이들을 지하실에 숨겼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4월 말, 아이들의 존재는 결국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관리의 레이더망에 걸리고 말았다. 한 우크라이나 정부 관리가 SNS에 올린 “아이들을 어서 교회 지하실보다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야 한다”는 글이 화근이었다. 다음날 교회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교회를 샅샅이 뒤졌다. 숨겨둔 무기를 찾는다는 명분이긴 했지만 이들의 목적은 분명 다른 데 있었다.
군인들이 아이들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자 며칠 후에는 사복 차림의 사내가 방송국 기자들을 대동하고 다시 나타났다. 러시아 공영방송국은 우크라이나인들이 갈 곳 없는 아이들을 교회에 숨겨두었다가 장기밀매 목적으로 몰래 미국으로 보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사복 차림의 사내는 이 방송에서 배후 인물로 스몰랴코브 목사가 지목됐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자칫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게 되자 목사는 하는 수 없이 다음날 몸을 피했고, 아이들은 신속히 다른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결국 헤르손이 해방되기 직전, 안타깝게도 러시아군에 발각돼 크름반도로 이송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러시아인들이 이렇게 아이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러시아 측은 공개적으로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을 러시아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시인했다. 그러면서 이를 가리켜 ‘자비’라고 불렀다. 오히려 우크라이나군의 폭격에서 아이들을 구조해주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 뻔뻔한 납치 행위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푸틴은 “모든 우크라이나 아동들이 간단한 절차를 거쳐 신속히 러시아 시민권을 발급 받을 수 있도록 하라”는 포고령까지 내렸다.
이와 관련, 아동 이주를 책임지고 있는 러시아 대통령실 아동인권 담당위원인 마리야 리보바-벨로바는 지난해 10월 “이미 350명의 아동이 성공적으로 러시아 가정에 입양됐다. 앞으로 1000명이 더 입양될 예정이다”라고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푸틴 대통령과 함께 현재 ICC에 의해 체포영장이 발부된 벨로바는 “나 역시 마리우폴에서 16세 남아인 필립을 공개입양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텔레그램에 “처음 며칠 동안 필립은 혼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자신이 자란 집과 친구들과 고향인 마리우폴을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그렇지 지금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러시아에 도착한 우크라이나 아이들은 모스크바부터 시베리아, 혹은 북극의 외딴마을까지 러시아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아이와 양부모를 매칭하는 건 전적으로 러시아 정부가 담당한다. 도착하고 한 달이 지난 시점에는 아이들에게 러시아 시민권이 발급되고, 러시아 정부는 입양 가족에게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자동차 한 대를 하사한다.
러시아 관리들은 우크라이나 아이들의 적응력이 뛰어나다고 말하면서 대부분 금세 러시아 사회에 녹아든다고 주장한다. 모스크바 지역을 담당하는 크세니야 미쇼노바는 “아이들을 다시 만났을 때는 못 알아봤다! 지금은 완벽하게 러시아 꼬마 시민들이 되어 있었다!”라며 감격했다.
과연 이게 사실일까. 아이들은 정말 러시아에서의 생활에 만족하는 걸까. ‘슈테른’은 “들리는 바에 따르면 아이들은 러시아에 도착한 직후에도 여전히 러시아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국가를 부르면서 반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했다. 한 소년은 러시아 입양 가정에 도착한 후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저는 여기서 영원히 살지는 않을 거예요.” “9월이 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이에 대해 벨로바는 “물론 처음에는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그래도 결국에는 모두 러시아를 사랑하게 된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러면서 도네츠크에서 온 한 고아 소녀의 동영상을 공유했다. 영상 속 소녀의 이름은 나스타자(16)로, 소녀는 러시아 군인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군가 ‘스베스다’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한편 러시아군은 헤르손에서 철수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아이들을 납치하려고 했다. 부모와 떨어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아이들이 대상이었다. 이에 우크라이나 의료진들은 진단서를 조작하는 식으로 조치를 취했다. 아이들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워서 마치 심각한 질병에 걸린 듯 위장한 것이다. 병원장인 올하 필랴르스카는 그런 식으로 아이들 수십 명을 구했다.
현재 ‘대피’ ‘구조’ ‘선의’라고 주장하는 러시아 측과 ‘강제 이주’ ‘납치’라고 주장하는 우크라이나와 서방국가 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런 가운데 과연 푸틴 대통령이 ICC의 체포영장에 적시된 ‘아동 납치’라는 전쟁범죄 행위에 책임을 지고 이를 중단할지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