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움직임 급격히 증가 기업 지배구조 개선 앞장…단기 차익 실현과 배당에만 몰두한다는 부정적 시각도
행동주의펀드는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계기로 대중들에 널리 알려졌다. 행동주의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엘리엇)는 당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비율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합병을 반대했다. 엘리엇은 결국 주주총회에서 삼성그룹 경영진과 표 대결을 펼쳤다. 엘리엇은 당시 삼성물산 지분 7.12%를 갖고 있었고, 소액주주들을 설득해 우군으로 확보할 계획이었다. 삼성그룹도 합병 정당성을 알리고 소액주주의 마음을 얻기 위해 광고 등을 통해 맞대응에 나섰다. 결국 삼성그룹 경영진이 표 대결에서 승리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은 계획대로 이뤄졌다.
행동주의펀드는 보폭을 넓혔다. 직접적으로 경영에 관여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존 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과 대립한 KCGI다. KCGI는 2020년 한진칼 지분 17.29%를 확보한 후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반도건설과 손을 잡고 조원태 회장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러나 KCGI 역시 주주총회 표 대결에서 조원태 회장을 이기지 못했다.
행동주의펀드는 올해 들어 눈에 띌 정도로 거센 공세를 펼치고 있다. 행동주의펀드는 국내 7개 금융지주사를 비롯해 SM엔터테인먼트(SM엔터), 남양유업, KT&G, JB금융지주, BYC, 태광산업, DB하이텍, KISCO홀딩스, 농심홀딩스 등을 대상으로 목소리를 냈다. KB증권에 따르면 국내에서도 2022년 하반기부터 행동주의펀드의 움직임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행동주의펀드의 활동 대상이 된 기업 수는 2020년 10개 기업에서 2022년 47개 기업으로 증가했다. 미국, 일본에 비해 대상 기업 수는 적지만 최근 증가세가 가장 가파르다는 것이 KB증권의 분석이다.
행동주의펀드가 최근 국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배경에는 2020년 12월 개정된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최대주주의 의결권 3% 제한’ 규정이 있다. 해당 규정의 주요 내용은 감사위원을 겸하는 사외이사를 선임할 때 최대주주의 의결권이 3%로 제한된다는 것이다. 행동주의펀드로서는 적은 지분율로도 감사위원 후보 추천을 통해 경영 참여가 가능해진 셈이다. 국내 기업의 저배당 정책도 배경으로 꼽힌다. 국내 기업의 배당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으로 알려졌고 자사주 매입·소각도 2021년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추세다. 이 때문에 행동주의펀드가 배당 확대 등 주주환원을 요구하면 소액주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행동주의펀드는 일부 기업에서 자신들의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행동주의펀드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얼라인)이 SM엔터에 라이크기획과의 계약 종료를 요구했고, SM엔터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라이크기획은 이수만 전 SM엔터 총괄프로듀서의 개인회사다. 남양유업의 경우 차파트너스가 추천한 심혜섭 변호사가 신임 감사로 선임됐다. 플래쉬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FCP)는 KT&G에 배당 확대, 분기배당 신설, 사외이사 증원 등을 요구했는데, 이 중 분기배당 신설이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외에는 행동주의펀드의 요구가 받아들여지거나 주주총회 표 대결에서 승리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성과가 없었다고 결론짓기는 섣부르다. 행동주의펀드의 타깃이 된 기업은 대부분 배당 확대 및 자사주 매입 등을 통해 주주환원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일례로 얼라인의 지적을 받은 4대 금융지주사(KB·신한·하나·우리)는 모두 올해 배당액을 늘렸다. 하나금융과 우리금융은 올해부터 분기배당도 실시하기로 했다.
얼라인 등 행동주의펀드는 내년에도 적극적인 활동을 예고했다. 경영진으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최대주주의 지분율이 낮은 기업이라면 행동주의펀드와의 주주총회 표 대결 승리도 장담할 수 없다. 기업들이 주주환원 정책을 펼치는 것도 행동주의펀드의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김수연 법무법인 광장 연구위원은 “지난해 국내 행동주의펀드의 기업 공격이 2019년 대비 약 6배 증가했다”며 “올해는 행동주의펀드의 기업 공격이 더욱 노골화되고 기관투자자의 주주권 행사도 더욱 강력해질 것이 예상되는 만큼 기업들은 기관투자자와의 소통을 강화하고 지배구조 공격에 대한 상시 대응 플랜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증권업계 일각에서는 행동주의펀드의 활동 덕에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란 국내 기업의 주가가 비슷한 수준의 외국 기업에 비해 낮게 형성된 현상을 뜻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유발하는 대표적인 요인으로는 기업 지배구조가 꼽힌다. 최대주주가 사적인 이익을 추구할 때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최대주주의 사적 이익 남용 가능성이 높으면 투자자의 투자도 꺼려질 수밖에 없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행동주의펀드의) 의미 있는 제안은 다수 주주의 대변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고, 이는 곧 모든 주주의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지배구조 개선 등으로 인한 시정 효과가 나타나면서 해당 기업의 주가 상승 등 주식시장에서의 순기능이 극대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세연 한화투자증권 연구원도 행동주의펀드에 대해 “총수를 중심으로 한 사익편취 등의 터널링, 부의 승계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유발했던 주요 원인이었다”며 “건전한 견제, 감시 기능을 활성화해 장기적으로 시장에 긍정적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행동주의펀드의 움직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행동주의펀드의 최근 행보를 살펴보면 차익 실현에만 집중할 뿐, 장기적 관점에서의 기업가치 상승에는 관심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 일각에서는 행동주의펀드를 ‘기업 사냥꾼’으로 평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법학원 관계자는 “행동주의펀드에 의한 경영관여는 기업의 수동적 경영으로의 변화 및 모험적 경영활동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면서 “장기적 경영 성과보다는 단기적 시세차익과 배당에만 관심을 가지는 주주에 의한 경영간섭으로의 변질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KCGI는 지난해 한진칼 보유 지분 전량을 호반건설에 매각했다. 일각에서는 KCGI가 주가 상승을 위해 한진그룹 경영권 분쟁을 촉발시킨 후 지분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차익을 실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KCGI는 한진칼 투자를 통해 투자금 대비 두 배가량의 차익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KCGI는 지분 매각 당시 “한진칼 엑시트(투자금 회수)를 위한 여건이 성립됐다고 판단한다”며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토대로 한진그룹의 부채비율이 낮아지며 재무, 수익구조가 획기적으로 개선됐고 오너 일가의 일탈과 독단적인 경영행태에서 벗어났다”고 설명했다.
행동주의펀드가 경영에 관여하거나 경영권 분쟁을 일으키면 높은 확률로 주가가 상승한다. 주가 상승 후 행동주의펀드가 해당 기업의 주식을 매각하면 상당한 차익 실현이 가능하다. 행동주의펀드가 주주제안을 한 기업의 주가는 20% 이상 상승하기도 했다. 김지현 키움증권 연구원은 “행동주의를 위시해 단기적인 시세차익을 노리고 악용하는 등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면서도 “이는 자본시장 선진화의 과도기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이고, 옳고 그름을 떠나 행동주의 사례 자체가 증가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주가 흐름만 놓고 보면 소액주주 입장에서 행동주의펀드의 행보가 늘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진 않는다. 주식을 매각하지 않더라도 주주총회가 끝난 후 주가가 하락하는 사례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SM엔터, KT&G 등의 현재 주가는 행동주의펀드가 활동을 시작할 때보다 오히려 낮게 형성돼 있다. 경영권 분쟁 등으로 인해 주가가 일시적으로 상승했다가 하락하면 변동성이 커져 소액주주들에게 혼란을 안겨줄 수 있다.
이와 관련, 재계 한 관계자는 “일부 행동주의펀드는 적대적 기업인수를 시도하려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순기능을 기대하기 어렵게 할 가능성이 크다”며 “높은 수준의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가져오면서 다른 주주의 이익이나 권리 강화에도 기여해야 성공할 가능성이 높고, 인식도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