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화살’이 ‘쏘지 않은 화살’ 된 까닭
▲ <후궁> 영문 포스터. 제목에 사용된 ‘concubine’은 불어로도 ‘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이번 필름마켓에서 가장 좋은 반응을 얻은 영화 중 하나는 <후궁:제왕의 첩>이다. 주연 배우 조여정의 농염한 모습이 강렬함을 주는 이 포스터에는 ‘THE CONCUBINE’이라는 제목이 인쇄돼 있다. ‘concubine’은 첩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다. 엄밀히 말해 ‘후궁’이라는 뜻을 모두 담지 못하고 ‘제왕의 첩’이라는 부제만 설명한 것이다.
<후궁:제왕의 첩>의 관계자는 “사극이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를 모르는 해외 바이어들에게 ‘후궁’의 정확한 의미를 담은 제목을 짓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concubine’은 영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로도 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해외 시장을 겨냥한 적절한 표현이었다”고 설명했다.
▲ <범죄와의 전쟁> 영문 포스터. |
이 영화는 노태우 정권이 실제로 선포한 ‘범죄와의 전쟁’이 진행된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아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매력적인 제목이지만 그래도 영작해 ‘The War of Crime’으로 했다면 매우 밋밋한 제목이 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NAMELESS GANGSTER(이름 없는 범죄자)’라는 원제목에 ‘RULES OF THE TIME(시대의 법칙)’이라는 부제를 달아 이 영화가 한국의 시대상을 반영한 갱스터 무비라는 것을 강조했다.
▲ <부러진 화살>의 영문 포스터. 제목 ‘UNBOWED’는 ‘발사되지 않은 활’로 의역할 수 있다. |
때문에 배급사는 영문명을 <UNBOWED>로 바꿨다. ‘unbowed’의 사전적 의미는 ‘패배하지(굴복하지) 않는’이다. 또한 bow가 명사로 ‘활’ 혹은 ‘활을 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UNBOWED’는 활이 발사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의역할 수 있다. 이는 판사에게 ‘석궁을 발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사법부와 맞서 싸우며 ‘굴복하지 않는’ 주인공의 상황을 동시에 대변하는 제목이라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간기남> <미확인 동영상:절대클릭금지> <반창꼬> 등은 각각 <THE SCENT> <DON’T CLICK> <LOVE 911>로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이번 칸국제영화제에 <돈의 맛>을 들고 참가한 롯데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예고편 정도만 보고 구매를 결정해야 하는 바이어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도드라진 포스터와 제목이 필요하다. 때문에 보다 보편적인 제목을 찾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해외에 수출되는 한국 드라마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다. 드라마 한류의 시작으로 손꼽히는 <대장금>은 일본에서 <宮廷女官 チャングムの誓>으로 소개됐다. 이는 ‘궁정여관 장금의 맹세’라는 의미다. 궁궐에서 일하는 장금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의미로 단순화된 셈이다.
하지원이 주연을 맡은 <다모> 역시 <チェオクの劍(채옥의 검)>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됐다. 극중 주인공이었던 채옥의 이름을 제목으로 끄집어낸 것이다.
MBC 관계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한자를 다루는 일본과 중국에서는 몇몇 드라마를 제외하고는 한국어 제목을 그대로 자국어로 옮겨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에서는 제목을 통째로 바꾸기도 한다. 일례로 이란에서 방송돼 9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거둔 <대장금>의 현지 제목은 ‘왕궁의 보석(jewelry in the palace)’이었다”고 밝혔다.
중국에서는 요즘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한국 드라마를 그대로 가져와 재방송하는 것이 아니라 리메이크 판권을 사는 것이다. 이 경우 대부분 제목 역시 새로 붙인다.
중국 드라마 <귀가의 유혹>이 대표적이다. 이는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누린 <아내의 유혹>을 리메이크한 드라마다. 게다가 한국 배우 추자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드라마가 끝난 뒤 추자현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또한 드라마 <가을동화>의 중국 리메이크작의 제목은 ‘일불소심애상니()’로 혼혈배우인 데니스 오가 원작의 원빈 역을 맡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중국에서 원작의 제목을 바꾼 리메이크 붐이 부는 이유는 따로 있다. 중국에 정통한 한 연예 관계자는 “한국 드라마가 중국 내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단속도 심해졌다. 한국 드라마를 그대로 틀거나 그대로 리메이크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기면서 내용과 인물구도를 살짝 바꾸거나, 제목을 바꿔 활로를 개척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외국 드라마라는 저항감이 덜해지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한국 드라마를 지속적으로 수출할 수 있는 현지화 전략이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안진용 스포츠한국 기자